반도체, 말기암, 불승인… 나는 홀로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녀의 우산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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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쏟아졌다. 비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나뭇잎과 우산을 쓴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잿빛 하늘 아래 죽음과 삶이 교차했다. 최진경(48) 씨는 이따금씩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 챙에 가려 그녀의 눈이 무얼 쫓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온기가 남은 커피잔만 매만졌다.

그 시절 ‘우산’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해물질 가득한 연구실에서 그녀를 지켜 줄 ‘우산’이 있었더라면 최 씨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까. 야속하게도 그녀에게 주어진 건 얇은 마스크 한 장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그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문서로도 남아 있지 않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문제가 있던 곳이라도 ‘문제 없는 작업장’이 될 수 있잖아요.”

‘문제의 작업장’에서 6년간 일했던 최 씨는 4기 유방암 환자다. 그녀는 몸에 퍼진 암을 일하다 생긴 질병으로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 씨는 23년 전 근무했던 작업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지난달 29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최진경 씨를 만났다. 어느덧 유방암 말기 환자가 된 그녀는 자신을 통증을 못 느끼는 ‘무통초인’이라고 소개했다. ⓒ셜록
그녀는 2000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 입사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을 이용해 반도체·LCD 공정 과정에 참여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작업장에는 각종 화학물질과 발암물질로 가득했다.

그녀는 IPA(이소프로필알코올), 아세톤 등 화학물질이 담긴 세정제에 손을 담그고, 발암물질로 알려진 니켈이 분사되는 작업대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가끔 밤새 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거의 화학물질에 빠졌다 나오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작업장에 유해물질은 가득한데 창문이나 환풍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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