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서 · 남고 재학하는 청소년 퀴어 페미니스트
2022/11/19
이 글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장애학의 탈시설 운동이다. 많은 사람은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조성된 특수 공간을 왜 폐기하려고 하냐며 도저히 탈시설 운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특별히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들은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왜 장애인에게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인가? (1) 그들의 답변을 하나로 정리하면, 장애인은 자신이 가진 의료적 손상(손상)으로 인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장애)을 겪고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핸디캡)에 놓이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척추장애인은 척추장애라는 의료적 손상으로 인해 버스를 타지 못하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는 등의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는 상당히 상식적이고 합당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자. 휠체어 이용자가 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버스를 타려면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스에 계단이 없고 출입문이 경사로라면? 이젠 휠체어 이용자도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척추장애는 바뀌지 않았는데 버스가 바뀌자 휠체어 이용자의 버스 이용 가능성도 바뀌었다. 그렇다면 척추장애인이 버스를 타지 못하는 것은 척추장애가 아니라 휠체어 이용자를 고려하지 않고 버스를 설계한 사회 때문이고, 사회가 버스를 바꾸면 척추 장애인도 얼마든지 버스를 탈 수 있으니 장애가 생길 일도 없으며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는 핸디캡을 겪지도 않을 테고, 척추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장애인 시설 수용자의 80%를 차지하는) 발달 장애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은 발달 장애인이 인지적 손상 때문에 자립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시설 밖에서 살아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러나 여러 국가에서는 이미 발달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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