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마약의 굴레

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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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5

미국 거대 약국들이 오피오이드 전염병 사태에 합의금을 지급한다. 약물 중독은 시스템의 문제다.

  • 미국 거대 약국 기업들이 오피오이드 중독 사태와 관련해 138억 달러를 합의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 불법으로 규정된 마약이 문제가 아니다. 마약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 자본과 정치, 합법과 불법 사이에 놓인 약물에서 중독의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NUMBER_ 10만 7000명

2021년 미국에서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해 10만 7000명이 사망했다. 5분에 한 명꼴로 사망하는 셈이다. 18세에서 45세 사이 미국 인구 중 처방 가능한 마약인 ‘펜타닐’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코로나19, 자살,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보다 많았다. 한국의 상황도 심각하다. 검찰청의 자료에 따르면 19세 이하 마약사범은 2019년 239명에서 2020년 313명으로 30.9퍼센트 늘었고, 2021년은 450명으로 43.7퍼센트 늘었다. 향정신성 식욕 억제제인 ‘디에타민’과 마약성 패치 펜타닐은 누구나 10분 만에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이다.
RECIPE_ 진통
https://youtu.be/LaxlJXpwkzs
현재 처방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향정신성 의약품은 ‘오피오이드(Opioid)’ 계열로 모르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진통, 진정 마약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사라 드위어트(Sarah DeWeerdt)가 지적한 오피오이드 위기의 근원은 다름 아닌 병원과 약국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오피오이드 계열 약물 처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를 거친 2010년대는 ‘오피오이드 전염병(Opioid Epidemic)’의 시대로 불린다. 2015년 미국은 100년 만에 처음으로 기대 수명이 감소했고,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중 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말기 암 환자나 수술 직후의 환자들에게 처방되던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 됐다.
MONEY_ 19조, 50조, 5조 원

마약은 어떻게 만병통치약이 됐을까? 현지시간 11월 1일, 월마트‧CVS‧월그린 등의 미국 거대 약국 기업들은 오피오이드 중독 사태와 관련해 총 138억 달러, 한화 19조 6000억 원을 합의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당국이 현재의 오피오이드 대량 확산 사태의 책임을 약을 판매한 기업에게 물은 것이다. 이 확산 사태의 주인공은 ‘옥시콘틴(Oxycontin)’으로 불리는 약물이다. 1892년 미국에서 설립된 제약 회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는 1952년 새클러 가문에 인수된 후 공격적인 제약 마케팅을 벌인다. 1996년 시판되기 시작한 옥시콘틴은 350억 달러, 우리 돈 50조 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오피오이드 사태의 중심이 된 퍼듀 파마는 2021년 5조 원의 파산 합의금을 냈고 2021년 9월 해산된다.
KEYPLAYER_ 새클러 가문

미술계와 학계 자선 사업으로 널리 알려진 새클러 가문의 재산은 15조 원에 달했다. 비법은 옥시콘틴을 유통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마케팅이었다. 새클러 가의 퍼듀 파마는 정치인과 의학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1조 원이 넘는 로비를 쏟아 부었다. 이는 당시 총기 관련 로비 자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였고, 오피오이드 처방을 막으려는 단체가 쓴 금액의 200배에 맞먹었다. 옥시콘틴을 처방하는 의사에게는 여행을 선물했고, 영업사원에게는 처방 수량에 따라 막대한 보너스를 줬다. 중독성이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옥시콘틴의 마케팅 영상은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는 관절염 환자의 인터뷰를 담았다. 돈과 접근성 등으로 인해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이들은 통증을 ‘완화’하길 원했다. 그들은 조용히 마약에 중독됐지만 의사의 권유와 공격적인 마케팅은 그 심각성조차 인식할 수 없게 했다. 더 많은 약을 원하지만 처방량을 늘릴 수 없는 이들은 불법 마약으로 눈을 돌렸다. 필라델피아의 켄싱턴 거리는 그렇게 ‘좀비 거리’가 되었다.
EFFECT_ 마약과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한 리처드 닉슨 정부는 처벌과 감옥으로 공공연했던 마약을 저지하려 했다. 한편으로 전쟁 선포는 닉슨 정부의 정치적 계산 결과기도 했다. 닉슨 정부 당시의 백악관 법률 고문이었던 존 에를리크만(John Ehrlichman)은 1968년 닉슨의 주적을 “반전 좌파와 흑인”이라고 표현했다. 마약을 범죄로 규정하는 행위는 주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일종의 합법적인 불법화였던 셈이다. 공공연하게 퍼져있던 마약이 범죄가 되자 감옥은 마약사범으로 가득했다. 출소한 이들은 금방 다시 마약에 손을 댔고, 제약 회사는 공격적인 오피오이드 마케팅을 펼쳤다.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은 더 가혹하게, 더 자주 검거됐다. 불법화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계속해서 중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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