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로만 기득권자로 살았다면 괜찮다. 고위공직자 돼도
2023/10/09
“나는 가난과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좌절의 경험도 없다.”
“요약하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재학 중에 고시를 패스했고 변호사가 되고도 큰 실패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에는 눈물겨운 성공담,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없다. 따라서 눈물겨운 감동도 없다. 억지로 감동을 자아낼 생각도 없고 내가 했던 고민을 과장할 생각도 없다.”
몇 해 전 별세한 황주명 변호사는 우리 사회 기득권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쓴 에세이 <사람을 생각한다>에서 그는 그 사실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황 변호사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고,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 법제처 국장을 맡았다.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출판사를 차려 돈을 많이 벌었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집이 부유한 것만이 아니라 황 씨 본인도 머리가 좋았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진학하고 소년등과한 뒤 군 법무관을 거쳐 20대 후반부터 판사 일을 시작한다. 30세 후반에는 판사를 그만 둔 뒤 국내 1호 사내 변호사로 대우실업 상무이사 겸 대우그룹 법제실장으로 일했다. 회사를 나온 뒤에는 법무법인 충청을 설립해 땅땅거리며 살았다.
하지만 책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딱히 탐욕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중산층이 많이 드러내는 극복의 서사도 없다. 그는 자신의 맡은 일에 대해서는 주변 분위기에 따라 변하지 않는 나름의 줏대 혹은 원칙이란 게 있었고(1차 사법파동 당시 사표를 냄), 사람을 상대할 때는 융통성을 발휘하며 지혜로운 결과를 이끌어 냈다. (스스로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굶어 죽을 일 없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분에 넘치는 것을 탐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비굴하게 만드는 압력에도 의연했다. “무릅을 꿇지 않은 삶”이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