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에 대한 히스테리의 사회
2022/12/14
근래 우리 사회는 '손해 보는 것'에 대한 히스테리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내게 손해를 주는 일이다. 그 앞에서는 어떠한 이해나 배려, 양보의 여지가 없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의 중요성이 말해지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에게 '손해'를 주지 않을 때이다. 배려는 손해볼 위험이 없는 영역에서만 가능할 뿐, 나에게 아주 작은 손해라도 전가되는 순간, 그떄부터는 어떠한 이해의 여지도 사라진다.
그런데 내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을 때만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왜냐하면 배려란 애초에 그 속성상 약간의 물러남, 약간의 이해심, 약간의 양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뒤따라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줄 때, 우리는 약...
그런데 내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을 때만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왜냐하면 배려란 애초에 그 속성상 약간의 물러남, 약간의 이해심, 약간의 양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뒤따라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줄 때, 우리는 약...
https://www.facebook.com/writerjiwoo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등의 책을 썼습니다.
현재는 변호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근래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해요. 저도 '손해 강박증'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풍족하지 못하고 계층적 뒷 배경이 없으면, 스스로 쌓아 올린 것들이 쉽게 빼앗기거나 없어지지 않을지 두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거든요.
이 강박의 잦은 표출은 '새치기'같은 작은 반칙에 분노가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 보았습니다.
근래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해요. 저도 '손해 강박증'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풍족하지 못하고 계층적 뒷 배경이 없으면, 스스로 쌓아 올린 것들이 쉽게 빼앗기거나 없어지지 않을지 두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거든요.
이 강박의 잦은 표출은 '새치기'같은 작은 반칙에 분노가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