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의 역습] 무해의 시대: 21세기 안전 패러다임의 계보와 전망

서울리뷰오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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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5
김홍중
 
작년 언젠가, 지인과 담소를 나누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무해’에 상당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되도록 타인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최은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올랐다. 주로 여성이거나 노인, 혹은 외국인인 이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무해한’ 사람들이다. 가령, 「고백」이라는 단편에서 최은영은, 내성적이고 선량한 친구인 진희에게 애틋한 우정을 느끼는 미주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96쪽
   

무해의 시대

무해한 사람! 직관적으로 그 존재를 어렴풋이 느껴 오기는 했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없던 어떤 심리풍경을, 이 평범한 단어는 조명탄처럼 비추어 준다. 사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끈끈하게 엉겨붙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점착성을 띠는 눈빛, 달라붙는 태도, 사적 영역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들의 ‘가해(加害)’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례를 친절로 착각하며 경계선을 침범하는 자들에게 불쾌를 넘어 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권력이 동반된 유해는 도덕적 문제인 동시에 법적 문제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 속에서, 구조화된 유해성을 행사하는 강자들에 대한 고발과 ‘탄핵’이 가차없이 수행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적 삶은 ‘이웃에게 무해하라’라는 새로운 인륜적 명령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피해에 대한 공감, 가해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
   
무해의 의미론은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넘어 자연이나 환경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우리 시대의 자연은 사회와 분리된 채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무구한 장소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은 이제 서로에게 유해한 존재로 뒤엉킨 채, 각자의 내부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이 폐기한 유해 물질은 복잡한 순환 과정을 거쳐, 모공과 호흡기를 통해 혈관에 흐르다 장기에 축적된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가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 부르는 이 얽힘은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질병들, 혹은 늙어 가면서 언젠가 한 번은 대면하게 되는 문제들(암, 아토피, 면역계 질환, 화학물질복합과민증, 새집증후군 등)을 통해 체감하는, 공통의 리얼리티이다.
   
* ‘생태 친화적인 삶(eco-friendly)’이나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제로-웨이스트(zero-waste)’한 생활이 ‘무해하다’는 형용사로 대체되기도 한다. 2020년에 출판된 두 권의 책의 제목이 그런 의미를 띠고 있다. 허유정 지음,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뜻밖, 2000. 그리고 신지혜 지음,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너에게』, 보틀프레스, 2000.
   
** 스테이시 앨러이모 지음, 윤준·김종갑 옮김, 『말, 살, 흙Bodily Natures』, 그린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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