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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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0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영연방이 흔들리고 있다. 대영제국의 잔상도 영면에 들고 있다.

  • 1952년부터 재위해 온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한 시대의 막이 내렸다.
  • 세계가 애도를 표하는 가운데 영연방 국가들에서는 탈군주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브렉시트, 새로운 총리,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로 영국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KEYPLAYER _ Queen

엘리자베스 2세는 살아있는 권위이자 죽은 권력이었다. 신비주의로 일관한 왕실의 전통을 깨고 1953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치러진 대관식을 TV로 생중계하며 그는 국민들의 안방에 들어왔다. 몰락한 대영제국의 현신으로서 영국인들의 긍지가 되어준 그는 영국의 소프트파워 그 자체였고 많은 영국인들은 그를 사랑했다.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영국인의 76퍼센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에 속상함을 표했으며 85퍼센트는 그가 영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다. 이는 군주제에 대한 지지(64퍼센트)로도 이어졌다.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몰락과 함께 많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몰락했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해는 장장 70년이 넘게 더 떠 있었다.
EFFECT _ 영연방

영국인들만의 왕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를 군주로 섬기는 곳은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 14곳이 더 있다. 인구를 모두 합치면 1억 3500만 명이다. 이들 국가는 영국과 동군연합(同君聯合)이다. 대표적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을 더하면 영미권의 군사 동맹 기구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된다. 넓게는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이라는 국제 기구가 있는데 여기에는 54개국이나 소속돼 있다.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로 따지면 25억 명,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이른다. 영국 본토와 식민지 자치령의 동등한 입지를 천명한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e of Westminster)’에 따라 만들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한 지 1년 만인 1953년, 약 7개월 간 호주와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영연방 13개국을 순방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그는 영연방을 지탱하는 힘이었고, 영연방은 곧 영국의 힘이었다.
STRATEGY _ 커먼웰스

만약 일왕이 광복 이후 한국을 방문해 가칭 ‘일연방’으로의 가입을 제안한다면 수긍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영연방에는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을 포함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나라까지 가입했다. 이들은 어쩌다 영연방에 모이게 되었을까? ‘공동의 부’라는 의미를 상기시키는 영연방의 영문 표기 ‘커먼웰스’에 답이 있다. 영연방은 회원국끼리 무역 비용이 21퍼센트 절감되며 국가 간 투자도 비회원국 사이에서보다 27퍼센트 높다. 이들 국가는 전세계 GDP의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니 엄청난 시장이다. 게다가 ‘DFID(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라는 매해 20조 원 규모의 영국의 해외 지원 사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과거에는 특별 비자 제도로 이주가 쉬웠으며, 런던 유학도 지원됐다.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상호 방위에도 협력한다. 4년간 한 번 열리는 스포츠 대회 ‘커먼웰스 게임’은 올림픽의 영연방 버전이다. 영연방을 지탱해 온 힘은 실리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약속이었다.
ANALYSIS _ 지킬 앤 하이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명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인간 본성의 선악을 이중 인격으로 표현한 명작이다. ‘신사의 나라’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불리는 근현대사 속 영국과 닮았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탱하는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를 보급한 선진국이지만 높은 ‘실크 햇(Silk Hat)’에 감춰진 악행은 나치 독일에 비견된다. 영연방은 그 이중성의 결과물이다. 제국주의 시절, 직접 통치를 선호하던 여타 열강과는 달리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시장으로 보고 토호 세력에 자치권을 주며 간접 통치했다. 식민지가 독립을 원하면 명예혁명 때와 같이 최대한 무혈 독립을 추구했고, 이후엔 영연방을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반발심이 크지 않던 이유다. 그러나 영국이 모든 ‘하이드’를 숨기진 못했다.
CONFLICT _ 무너진 동상

2021년 7월 1일, 국경일을 맞은 영연방 소속 캐나다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위니펙시에서는 지방 의회에 설치된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상이 무너져내렸다. 과거 가톨릭교회가 운영한 원주민 기숙 학교 세 곳에서 1100구에 이르는 유해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린이들로 캐나다 원주민 아동에 대한 학대 및 학살의 근거로 떠올랐다. 이 유해는 1800년대 이후 유럽 문화 주입을 위한 캐나다 정부의 강제 동화 정책 당시 부모로부터 격리된 원주민 아동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숙 학교들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캐나다를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 당시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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