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과 어른스러움

예전에 미디어 오늘 칼럼으로 정용진 씨를 비판한 적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선 정용진 씨한테 동조하는 댓글들 보면서 든 생각을 썼었죠. 정용진 씨 인스타에 달린 댓글들을 쭉 훑다보면 ‘강자동일시’ 심리가 굉장히 세게 느껴졌거든요. 최근 다시 인스타를 들어가 봤는데 댓글들은 여전하더군요. 그중에 좀 흥미롭게 본 사람이 있었는데요. “중국 북한 빨갱이들은 죽여야 제 맛” 대충 이런 댓글을 다신 분이었어요. 그 분의 인스타를 가보니까 최근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셨더라구요. 거기서 맨날 나오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란 대사는 들을 때마다 막 가슴이 울컥 하신데요. 정작 큰 힘에 아무 책임을 안 지는 부회장님의 행동엔 동조하면서 말이죠. 이 엄청난 인지부조화를 보면서 역시 사람이란 참 어렵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미디어 오늘 칼럼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886)

저는 멸공 논란보다 그 이후 대처에 더 주목했어요. 사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정말로 공산주의가 혐오스러울 수 있어요. 그걸 인스타에 올리는 것까지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당시 피곤하셨을 수도 있고 술 좀 취하셔서 감정적이셨을 수도 있죠. 근데 끝까지 사과 안 하는 모습. 입장표명을 빙자한 난잡스러운 변명문. 멸공 얘기 안 하겠다고 ‘측근을 통해서’ 언급하는 태도. 불매 운동 게시물을 굳이 박제해서 비꼬는 행태까지. 이 어이없는 후속 대처들을 보면서, 메르스 때 삼성병원에서 낸 사과문 떠올리신 분들이 꽤 많을 거예요.

이재용 씨 본인이 그걸 쓰셨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사과문 자체는 명문으로 회자되면서 회사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됐죠. 사실 이재용 씨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어요. 메르스 대응 미숙이 오롯하게 자기 탓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자의식을 굽힐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사과가 미칠 파급력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싶어요. 강자들일수록 사과의 값어치 또한 높아지니까요. 최근 신세계 주가가 엄청나게 떨어졌다지요? 그럼에도 이토록 비교되는 대처를 보면서, 과연 자의식이란 무엇일까 잠깐 고민하게 됐어요.

사과란 자의식이란 담벼락에 쓴 낙서를 청소하는 행위 아닐까 싶어요. 틀림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지워나가는 과정이요. 담벼락 면적이 작을수록 사과도 훨씬 쉽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사회는 이 담벼락 면적을 줄이는 걸 어른스러움의 기준처럼 치부해요. 자의식이 작을수록 어른스럽다는 거죠. 저는 원래 이 기준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이 어른스러움을 약자들이 더 심하게 강요받거든요. 제가 딱 세 달 동안 편의점 알바를 했던 적이 있는데요. 이 일이 몸은 좀 편한데 마음이 너무 피곤하더라구요. 사장 부부는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알바생을 사람으로 안 보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정말 온갖 트집을 잡고 사람 깎아내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갑질하는 거죠. 갑질은 타인의 담벼락에 마구 낙서를 하는 거예요. 자신 담벼락은 더럽히기 싫어서 딴 데다 낙서 해놓고 정작 남더러 지울 것을 강요하죠.

편의점에서 한 달쯤 일하다 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대부분 상황이 ‘죄송합니다.’ 한마디로 진화된다는 사실을요. 저 뿐만 아니라 알바 대다수가 손님과 사장의 부당한 짓에 항의하기보단 사과를 택해요. 자기가 하지도 않은 낙서 때문에 담벼락에다 대걸레를 갖다 대야 하는 상황이죠. 이렇게 자의식의 담벼락이 타인의 낙서 때문에 더럽혀지는 과정에서 상처 받은 분들을 많이 봤어요.

저는 일부 졸부들의 갑질. 유치하게 아파트로 사람 급 나누고, 경비원들한테 온갖 나쁜 짓을 골라서 하고, 노동자 분들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드는 행위들. 그 모든 행위들은 갑질하는 본인이 과거 자의식에 수많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 아닐까 추측했어요. 이 분들은 과거 가난할 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냉소하며 세상을 저주했을 거예요. 성공하겠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겠죠. 저도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품었어요. 성공해서 부자가 되면 누구도 함부로 자기 담벼락에 낙서를 하지 않음을 깨달았으니까요.

제가 원래는 자의식을 죽이는 ‘어른스러움’의 기준에 동의하지 않았었다고 했었죠? 그땐 정확히 구분을 하질 못했어요. 자기 담벼락에 자신의 낙서를 지우는 것과, 자기 담벼락에 타인의 낙서를 지우는 것. 두 사과는 엄연히 다른데도 그땐 똑같아 보였거든요.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 자기 담벼락에 타인의 낙서를 지우는 건 처세술이고, 자기 담벼락의 자신의 낙서를 지우는 것이 어른스러움이란 걸요. 갑질을 하는 분들은 이 두 가지가 다름을 아직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참 안타까운 노릇이죠.

본래 이 글의 주제는 서울에서 뵌 두 기자 분들과 ‘자의식의 가격’에 대해서 얘기하다 나왔는데요. 최근 실수하고 사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좀 돌아보게 되면서 글로 남겨보았습니다. 자의식의 가치란 참 매기기 어렵네요.
아주아주 비싼 사과의 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