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자의 도덕적 우월 : 이태원 참사 그 이후

박하
박하 인증된 계정 · 배낭여행자
2022/12/13

호스텔의 늦은 밤, 초저녁에 잠든 터라 정신이 몽롱해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게스트의 스타일대로 제각기 다른 일과에 거실엔 24시간 누군가라도 머물러 있었다. 사내 둘이 다과와 홍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들은 내게 방금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를 알렸다. 수많은 사람이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로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감정에도 항로라는 게 있는 편이라고 믿어왔다. 인간의 감정적 항해에는 관성이라는 게 있어 느긋함과 온화함을 기조로 갖은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슬픔을 유연하게 흘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역정과 닦달을 기반으로 화를 찾아 분노에 기생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이태원의 소식을 듣고 나서 단언컨대 전자와 후자 모두가 손 쓸 새도 없이 침몰했으리라. 항로를 잃고 갈피를 못 잡아 나침반 바늘이 팽팽 돌아가고 있는 내 마음이 그렇듯.

사내 둘이 말한 스스로의 소개를 빌어오자면 A는 은퇴한 캐나다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 B는 러시아 모 대학의 공과대 교수였다. 둘은 뉴욕 타임즈 속보를 통해 내게 소식을 알렸고 난 하늘이 무너지는 기세로 곧장 정보를 검색했다. 인터넷이 여의치 않은 도시였다. 느릿느릿 버퍼링을 바라보며 황망해하다 이게 사실인지 부정 상태를 넘어 로딩을 뚫고 계속 이리저리 정보를 찾기만 했다.

그리하여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가까운 친구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할로윈 축제에 나섰을만한 친구들. 주변을 둘러본다는 게 이렇게 후순위로 밀렸을 때에야 자기 자신이 얼마나 험악한 개인주인자인가 깨닫고 만다. 대부분의 친구가 이태원으로 가지는 않았으나 그 중 몇몇은 현장에서 사고가 벌어지기 전 자리를 떠났다며 안 그래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다 했다. 어느 기로에 잠시 서 있던 기분이었다면서.

연락을 받아 조금 차분해진 나를 보고 사내들이 말을 걸었다. 돌이켜보면 교수들이 이 가난한 호스텔에 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낯선 나라의 사고 소식을 해당 국가 출신에게 알리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리고 교수 둘은 이미 대화의 진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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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저 곳을 떠돌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어느 곳에도 주소지가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으려는 마음>, <워크 앤 프리>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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