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자본주의적' 기후위기 걱정
2023/01/18
제주의 자연환경을 ‘너무 사랑해서’ 이주했다는 이들을 가끔 만난다. 육지에서 섬으로 온 사람치고 그 이유 없는 경우는 드물지만, 누가 묻지 않아도 드러낼 정도라면 환경을 걱정하는 자신의 각별한 관심이 생업에도 겹쳐져 있을 거다. 일터나 SNS에 그런 느낌을 자욱하게 입히는 작가, 화가, 조각가, 바리스타, 베이커, 플로리스트 등등이 제주에는 많다.
좋은 현상이다. 나도 이곳의 자연을 좋아하면서 제주의 환경훼손 이슈에 관심이 커졌지만, 제주가 좋아서라기보단 도시가 싫어서 온 이유가 더 강하기에 열과 성을 다해 제주 예찬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툰베리 저리 가라는 에너지를 보유한 이들을 만나면 뜨뜻미지근한 내가 좀 부끄럽기도 하다.
초대받았을 때도 망설였다. 환경을 키워드로 강력히 연결된 이들이 마련한 마켓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후위기 관련 퀴즈를 내고 선물을 주는 부스를 맡았다. 시골에, 낭만적인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 곳곳에 ‘제로웨이스트’라는 문구가 나부꼈다. ‘채식주의’, ‘육식반대’ 등의 단어들도 곳곳에서 등장했고 바다에 넘쳐나는 플라스틱으로 고통받는 거북이나 고래 사진도 많았다. 일회용품은 볼 수 없었고 지역 농산물로 만들었다는 특별한 비건 샌드위치를 판매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화 중에누구누구 대학 어디 나왔대, 그 사람 집이 자가냐 아니냐 등이 들려서 언어와 공간의 엇물림에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들끼리는 조화로워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취지는 좋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러 행사가 끝나고 조촐한 뒤풀이 자리에서 돌아가며 소감을 주고받는데, 모두가 ‘지구를 지키는 자신의 소신’을 진중하게 강의했다. 플라스틱 배출을 하지 않는 비법과 친환경 제품을 사용한 경험담이 많았다. 공동 구매 정보를 너무 상세히 공유하길래 살짝 불편했지만 그걸 드러낼 자리는 아니었다. 한 사람당 20분은 넘게 말을 하는데 다른 이들의 집중력과 공감도가 대단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앞으로 잘하겠다고 머리만 긁적거리면 혼날 것 같아서, 쓰레기를 줄이는 나름의 노력을 말했다. 너무 경건한 공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의미 있는 자리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자본주의 건드리지 않는 기후위기 걱정
“저는 옷을 거의 사지 않아요.” 진짜다. 사질 않으니 버리는 옷도 별로 없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이 가치관은 현대사회에서 의류산업이 야기하는 ‘대단한’ 환경오염을 고려할 때 얼떨결일지라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건드리지 않는 기후위기 걱정
“저는 옷을 거의 사지 않아요.” 진짜다. 사질 않으니 버리는 옷도 별로 없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이 가치관은 현대사회에서 의류산업이 야기하는 ‘대단한’ 환경오염을 고려할 때 얼떨결일지라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나는 옷 한 벌 만드는데 필요한 물이 상상을 초월한다 등의 고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탄소배출 문제와 선진국의 옷들이 다른 나라로 가서 쓰레기산이 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의 옷이 재활용된다는 것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은 인터넷 검색 1초면 확인할 수 있다.
버리는 옷의 일부만이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로 흘러간다. 거기서 다시 일부가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그냥 방치된다. 결론은 당신이 입고 버린 쓰레기가 다른 나라에 묻혀 토양을, 수질을 오염시킨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해결해야 한다. 잘 버려서? 그게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폐의류가 하루 225톤이다. 그리고 공장에서 버려지는 폐섬유가 하루 1,089톤이다. 하루가 저 정도다(SBS 뉴스. '패스트패션'에서 옷 얼마나 사나요? 2023. 01. 12. 안혜민 기자). 정답은 간단하다. 플라스틱 줄이려면 ‘사용하지 않기’가 중요하고 누구도 이 대전제에 토를 달지 않는 것처럼, 옷도 소비 자체가 절대적으로 줄어야지만 유의미한 개선이 가능하다. 벗고 살라는 게 아니라, 필요 이상의 구매를 인정하자는 거다. 그리고 한걸음만 더 들어가자. 옷이 좋아서 옷이 많을 거다, 그런데 이 좋음이 순수한 좋음일까. 집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강박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나. 그 배경을 짚어보지 않고 지구를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경쟁이 심한 곳에선 사람도 상품이 되고 옷은 그 상품의 포장지가 되고 심지어는 옷이 사람 자체가 되어 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논리구조가 우스운 줄도 모른 채 등장한다. “옷 입은 것만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표현은 얼마나 흔한가. 그러니 옷을 산다. 또 산다. 자주 산다. 비슷한 옷이 있어도 산다. 유행하니까. 신상이니까. 내게 어울리니까. 열심히 살았으니까.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까. 무시당할까 봐. 괜한 오해받기 싫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습관이라서 등등 이유는 차고 넘친다.
버리는 옷의 일부만이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로 흘러간다. 거기서 다시 일부가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그냥 방치된다. 결론은 당신이 입고 버린 쓰레기가 다른 나라에 묻혀 토양을, 수질을 오염시킨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해결해야 한다. 잘 버려서? 그게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폐의류가 하루 225톤이다. 그리고 공장에서 버려지는 폐섬유가 하루 1,089톤이다. 하루가 저 정도다(SBS 뉴스. '패스트패션'에서 옷 얼마나 사나요? 2023. 01. 12. 안혜민 기자).
경쟁이 심한 곳에선 사람도 상품이 되고 옷은 그 상품의 포장지가 되고 심지어는 옷이 사람 자체가 되어 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논리구조가 우스운 줄도 모른 채 등장한다. “옷 입은 것만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표현은 얼마나 흔한가. 그러니 옷을 산다. 또 산다. 자주 산다. 비슷한 옷이 있어도 산다. 유행하니까. 신상이니까. 내게 어울리니까. 열심히 살았으니까.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까. 무시당할까 봐. 괜한 오해받기 싫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습관이라서 등등 이유는 차고 넘친다.
옷은 ‘많이’ 만들어지기에 ‘많이’ 버려지고, 그러니 옷은 플라스틱처럼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자연을 파괴하고 있으니, 불평등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요약하자면, 옷이 문제가 아니라 옷 하나에 기분이 달라지는 현대인의 시선과 태도 그리고 그걸 유도하는 이 빌어먹을(이라고 말하진 않음) 자본주의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고서 환경은 개선될 수 없다. 플라스틱도 마찬가지다. 플라스틱이 편리한 게 아니라, 사람이 ‘바쁘고 지치는 것’과 비례해 그렇게 느껴진다. 환경을 위한다면, 환경을 훼손하면서 삶의 고단함을 잊어야 하는 이 사회의 잔인함부터 물고 늘어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분위기는 일순간 썰렁해졌다. 공감의 적막감이 아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이없다는 신호를 품은숨소리만이 공기 사이를 파고든다. 눈빛들이 보내는 바는 명확했다. 왜 이상한 소릴 하냐. 그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온다. 혼잣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크기였고 또박또박한 발음은 내 이야기가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음을 느끼라는 분명한 의도였다. “네~, 그래서 작가님은 항상 같은 옷만 입고 다녔구나. 하하하.”
차별에 찬성하면서 기후위기가 해결될 수 있을까?
내겐 익숙한 무안함이었다. 현대사회의 환경문제는 그 원인이 현대사회에 있다. 기후 위기는, 기후가 ‘현대사회를’ 관통하면서 오랫동안 일관되었던 예측값이 변죽을 울리는 현상이다. 결과는 혼탁하지만 원인은 매우 선명하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결과로써 환경재앙을 목격하고 흥분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붙들고 흔들지 않는다. 이런 시대 공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가에게 낯설지 않다.
나는 그날 그곳에선 잠시나마 자신감을 가졌었다. 그래서 “환경을 살리려면, 어쩔수 없다는 그 선을 확 넘어야 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선을 넘었다고 나는 조롱받았다. 이게, 천천히 넘어가자는 ‘속도조절론’이라면 방향의 동일성이 있으니 신나게 토론하면 될 일이겠지만 나의 의견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받았다.
환경에 관심 가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게 목적이 되면 자기소개서의 한 줄처럼 환경이 언급된다. 그러면 다른 건 전혀 환경적이지 않아도, 심지어 사상적 뿌리가 매우 환경 파괴적일지라도 ‘어떤’ 환경적인 것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언론은 또 이런 사람에게 마이크를 쥐어준다. 기업은 이들을 만족시킬 친환경 위장술 ‘그린워싱’(greenwashing)을 ‘지속가능한’이라는 단어만 밑도 끝도 없이 나열하면서 진행한다. 그래서 어떤 기업의 문제는 환경적이라는 설명 몇 줄 붙은 제품 몇 개 덕택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제품을 ‘사용하는 자신을 홍보하며’ 그린워싱한다. 아주 일부일 거다. 하지만 이 일부가 만들어내는 환경운동에 대한 편견은 결국 지구를 살리는 시간을 지체한다.
인종, 종교, 성정체성을 혐오하면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순 있지만 ‘그러면서’ 환경주의자가 될 순 없다. 혐오받는 자가, 지구의 미래까지 걱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쟁은 어쩔 수 없기에 능력 없으면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종이컵 사용을 자제할 순 있지만 ‘그러면서’ 일회용품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망상이다. 차별받는 자가, 플라스틱 빨대가 태평양 어디를 떠도는지에 진중하게 관심을 가지긴 어렵다. 힘들고 지치면 삶 안에 '기후'라는 단어를 무게감 있는 준거점으로 설정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여유롭게 휴식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뒷정리하고 멍 때릴 수 있는 시간까지 가진다면 쓰레기는 저절로 준다. 풀어서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지구를 살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존의 환경파괴를 세상에 알리다가 농장 지주에게 암살당한 노동자이자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Chico Mendes, 1944-1988)가 말하지 않았던가. 계급투쟁 없는 환경운동은 단지 정원 가꾸기에 불과하다고(Environmentalism without class struggle is just gardening). 계급, 투쟁이란 단어를 확대해석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불평등에 찬성하면서 환경을 걱정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이다. 불편한 자본주의와 싸우는 게 불편하다면, 차라리 기후위기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믿는 게 솔직한 것 아닌가.
** 이 글에 등장하는 개인적 에피소드는 필자의 다른 글 "그들은 정말로 지구를 걱정했을까?"(문학사상. 2022년 8월호)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차별에 찬성하면서 기후위기가 해결될 수 있을까?
내겐 익숙한 무안함이었다. 현대사회의 환경문제는 그 원인이 현대사회에 있다. 기후 위기는, 기후가 ‘현대사회를’ 관통하면서 오랫동안 일관되었던 예측값이 변죽을 울리는 현상이다. 결과는 혼탁하지만 원인은 매우 선명하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결과로써 환경재앙을 목격하고 흥분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붙들고 흔들지 않는다. 이런 시대 공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가에게 낯설지 않다.
나는 그날 그곳에선 잠시나마 자신감을 가졌었다. 그래서 “환경을 살리려면, 어쩔수 없다는 그 선을 확 넘어야 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선을 넘었다고 나는 조롱받았다. 이게, 천천히 넘어가자는 ‘속도조절론’이라면 방향의 동일성이 있으니 신나게 토론하면 될 일이겠지만 나의 의견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받았다.
환경에 관심 가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게 목적이 되면 자기소개서의 한 줄처럼 환경이 언급된다. 그러면 다른 건 전혀 환경적이지 않아도, 심지어 사상적 뿌리가 매우 환경 파괴적일지라도 ‘어떤’ 환경적인 것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언론은 또 이런 사람에게 마이크를 쥐어준다. 기업은 이들을 만족시킬 친환경 위장술 ‘그린워싱’(greenwashing)을 ‘지속가능한’이라는 단어만 밑도 끝도 없이 나열하면서 진행한다. 그래서 어떤 기업의 문제는 환경적이라는 설명 몇 줄 붙은 제품 몇 개 덕택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제품을 ‘사용하는 자신을 홍보하며’ 그린워싱한다. 아주 일부일 거다. 하지만 이 일부가 만들어내는 환경운동에 대한 편견은 결국 지구를 살리는 시간을 지체한다.
인종, 종교, 성정체성을 혐오하면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순 있지만 ‘그러면서’ 환경주의자가 될 순 없다. 혐오받는 자가, 지구의 미래까지 걱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쟁은 어쩔 수 없기에 능력 없으면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종이컵 사용을 자제할 순 있지만 ‘그러면서’ 일회용품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망상이다. 차별받는 자가, 플라스틱 빨대가 태평양 어디를 떠도는지에 진중하게 관심을 가지긴 어렵다. 힘들고 지치면 삶 안에 '기후'라는 단어를 무게감 있는 준거점으로 설정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여유롭게 휴식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뒷정리하고 멍 때릴 수 있는 시간까지 가진다면 쓰레기는 저절로 준다. 풀어서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지구를 살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존의 환경파괴를 세상에 알리다가 농장 지주에게 암살당한 노동자이자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Chico Mendes, 1944-1988)가 말하지 않았던가. 계급투쟁 없는 환경운동은 단지 정원 가꾸기에 불과하다고(Environmentalism without class struggle is just gardening). 계급, 투쟁이란 단어를 확대해석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불평등에 찬성하면서 환경을 걱정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이다. 불편한 자본주의와 싸우는 게 불편하다면, 차라리 기후위기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믿는 게 솔직한 것 아닌가.
** 이 글에 등장하는 개인적 에피소드는 필자의 다른 글 "그들은 정말로 지구를 걱정했을까?"(문학사상. 2022년 8월호)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며칠 전 글쓴님이 쓰신 다른 글에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어느 자리에서 굳이 4.3 사태 이야기를 꺼내신 에피소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글쓴님이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저 썰렁한 분위기와 무안함을 감수하는 것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아끼는 지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자기가 직접 굳이 저런 역할을 맡는 사람이 되는걸 원하진 않네요.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자리의 분위기와 맥락을 적절히 고려하여 대화하는 것 또한 사회생활에 중요한 가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글쓴님이 기고하신 또 다른 칼럼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네요. (제목: 그런 말 듣고자 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에 꽂힌 이들은 시야를 사람으로 넓히지 않는다. 자기 관심사와 비슷한 결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그것만을 붙들고 대화의 맥락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무례를 일삼지만 본인은 그게 문제인 줄 모른다. 서운하다고 한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정색한다.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강박으로 무장되면,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