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로 살았던 시간의 기억 4

박순우(박현안)
박순우(박현안) · 쓰는 사람
2022/12/12
가만히 있으면 바보 같은 년이 되고, 행동을 하면 독한 년이 된다. 이런 류의 사건에서 대다수의 피해자가 받는 시선이다. 가만히 있으면 밟아도 꿈틀 대지 않는 누구나 함부로 해도 되는 여자가 되고, 어떻게든 처벌을 받게 하려고 동분서주하면 물귀신 같이 물고 늘어지는 기가 센 여자가 된다. 둘 중 하나라면 나는 차라리 독한 년이 되고 싶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피해자가 왜 더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할까. 피해자가 왜 고개를 떨구고 걸어야 할까. 피해자가 왜 쫓겨나야 할까. 그런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 뛰어야 했다. 

시민단체의 지원이 생겼다고는 하나, 탄원서를 받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H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여기자들을 죄다 찾아다녔다. 진짜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느냐는 물음에는 하늘이 무너졌다. 맹세코 그런 말은 입에 담은 적도 없다고 강조해 말해야만 했다. 여전히 어딘가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의심을 가진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을 설득하며, 사정사정해가며, 탄원서를 한 장 한 장 늘려갔다. 

사연은 넘쳐흘렀다. 시도 때도 없이 음담패설을 입에 담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연이 있는데도 그동안 묵묵히 듣고만 있었던 여기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기자이면서도, 남성 중심적인 음담패설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고, 여성들이 학교나 직장, 사회에서 일상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사회였다. 남자들이 모이면 여자들의 외모에 대해 품평회를 하거나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탄원서를 받았고 사건 경위서도 정리해 두었다. 기자협회 OO지부에 H 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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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씁니다.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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