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괴롭힘과 집단 트라우마
2023/10/13
친구를 만나면 직장 또는 가족 간의 불화나 갈등을 하소연하며 누가 가장 힘든가 경쟁이라도 하듯 '불행배틀'시간을 갖습니다.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 끔찍한 상사부터 시작해 듣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시월드 이야기 등등요. '내가 속한 집단에 나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 악당은 나다'라는 말이 있어요. 한국은 특히나 인구통계학적 사실이라는 속설이 있을 만큼 어느 집단에나 꼭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며 착취하는 이가 꼭 있더라고요.
우리 사회는 '리얼 라이프 빌런'에 대한 집단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보다 나이나 연차가 높은 위치에 있는 가족이나 상급자인 빌런들에 의한 아픈 기억이요. 학교 선배, 직장 상사, 지도교수 심지어 부모님의 모습을 한 빌런들로부터 정신적으로 착취당한 경험이 모든 구성원들의 인생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최근 MZ로 불리는 청년 세대의 행동 방식을 위와 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MZ세대는 본보기로 삼을 어른도,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는 어른도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교사', 즉 '너희들이 하는 행동을 반대로만 하면 제대로 사는 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행동 규정을 만들어 누가 뭐라고 해도 말없이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삽니다. ’MZ‘는 어쩌면 리얼 라이프 빌런들로부터 경계를 확실히 만들고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켜온 젊은이들이 만든 문화가 아닐까요. 부서 전체가 의미 없는 야근을 하는 강압적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냉정하게 칼같이 퇴근을 해버리거나, 말도 안 되는 상급자의 농담에 대충 분위기 맞춰 웃어주는 감정 노동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또 다른 예로, 우리나라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절하는 중요한 이유는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입니다. 사회에서의 명예와 성공을 위한 인맥을 넓히는 일에 한평생 몰두한 이기적인 아버지. 그리고 남자를 하늘처럼 받들며 묵묵히 내조하고, 가사...
사람과 세상을 깊이 읽고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전업 작가, 프리랜서 기고가로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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