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재해”… 삼성 반도체 태아산재 최초 인정[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아픔 24화]
2024/03/26
가방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손바닥 크기로 고이 접혀 있었다. 천 일을 넘게 기다린 김혜주(가명) 씨가 이날을 위해 준비해온 답변서.
그는 첫 문장부터 차근차근 속으로 읽어내렸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자꾸만 마른 침을 삼켰다. 지난 15일, 근로복지공단 소속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 심의에 출석하기 1시간 전 모습이다.
김혜주 씨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였다. 김 씨는 2021년 5월 20일, 삼성 반도체 출신 노동자 2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아이의 선천적 질병이 엄마 탓이 아닌, 업무에서 비롯된 산업재해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서다.(관련기사 : <‘임신 8개월’ 반도체공장 근무, 아이 신장 하나 사라졌다>) 김 씨는 1995년 만 17세에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당시 그는 ‘마스크’(전자회로를 그려놓은 유리판)를 생산하는 라인에 배치됐다. 화학물질이 담긴 30cm짜리 플라스틱 통을 들어 직접 기계에 붓는 일도 김 씨의 업무였다.
김 씨는 이런 일을 임신 8개월 때까지 했다. 그리고 출산 45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김 씨는 2004년 9월 아들 김민준(가명)을 낳았다. 김 군은 왼쪽 신장이 없는 채로 태어났다. 10살에는 ‘IgA신증’을 진단받았다. 이 병은 사구체(모세혈관 다발)에서 단백질과 적혈구가 빠져나가 단백뇨와 혈뇨가 발생하는 염증성 신장 질환이다. 현재 김 군의 오른쪽 신장은 제 기능을 10%밖에 하지 못한다.
“민준이만 보면, 뭐든 ‘안 돼!‘부터 말하니까 속상해요. 신장이 안 좋으니 짠 걸 먹으면 안 되거든요. 애가 운동도 좋아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면 또 혈뇨를 볼 수 있으니까 자제하라고 자주 말하죠. 민준이한테 늘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2021. 7. 13. 인터뷰 중)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동에 있는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