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려준 종갓집 맏며느리 -엄마와 페미니즘 하기(7)
2022/10/20
덕천동 큰손 홍여사
“아, 엄마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
“진짜 조금씩밖에 안 담았어. 집에서 먹고 도시락 싸먹고 하면 며칠 먹을 것밖에 안 돼.”
“삼시세끼를 먹어도 이거 남아. 남으면 다 음식물쓰레기 된다니까.”
추석 연휴에 본가에 갔다가 명절 음식을 잔뜩 받아왔다. ‘엄마 제발 적게 담아줘, 다 못 먹어, 다 버려’를 몇 번을 말하고서야 겨우 쇼핑백 하나만 들 수 있었다. 말이 쇼핑백 하나지 그 안에 든 몇 개의 반찬통을 보면서 새삼 엄마의 손이 얼마나 큰지 느꼈다. 동생과 내가 독립하기 전 네 식구가 함께 살 때도 엄마는 손이 커서 음식을 늘 많이 했다. 우리는 엄마에게 음식 먹을 만큼만 하라고 잔소리를 했고, 엄마는 우리에게 사람이 손이 그렇게 작아서야 어떻게 먹고 살겠냐고 잔소리를 했다.
어릴 때부터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을 뜨더라도 엄마에게 손이 작다는 얘기를 매일같이 들었다보니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여행만 가도 너는 손이 너무 크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거 너무 많지 않냐고, 남으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소금 간 적당히’처럼 ‘손’의 크기는 상대적이었고 엄마의 기준이 너무 컸던 것일 뿐. 내 손이 크다니! 우리 자매의 손이 크다니...!
엄마가 손이 큰 것은 종갓집 맏며느리이기 때문이다. 큰 집안, 제사 한 번을 지내면 제사상이며 손님 주안상과 다과상, 손님들 돌아가실 때 가져갈 음식까지 준비해야 했으니 음식을 많이 할 수밖에. 엄마 아빠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집 ‘규모’가 이 정도면 많이 작아진 것이라고 한다. 엄마도 결혼하고서 할머니가 어찌나 손이 크신지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치 한번 담그면 배추 세 접, 그러니까 한 접이 100개니까 배추 300포기는 기본이었고 된장 고추장도 집에서 직접 담가 먹었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절구에 콩을 찧는 일을 담당했고 낮이나 밤이나 메주와 함께 방을 썼다. 집에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뒤주는 늘 차있도록 해야 했다. 어느 때에 얼마만...
선천적 예민러, 프로불편러, 하고재비. '썬'을 이름으로 자주 쓴다.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가만히 있기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특별히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