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이라는 폭력, 이러다가 합법적으로 총기 소지 하겠다

오찬호
2023/05/24
이스라엘 아데산야는 종합격투기 단체 UFC 미들급 챔피언이다. 화려한 성적과 만화 같은 실력을 보유했지만, 과거 한 선수에게 두 차례나 패배한 적이  있었다. 아데산야를 괴롭혔던 선수는 알렉스 페레이라인데, 그가 UFC로 오자 언론과 팬들은 맞대결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성사된다. 결과는 챔피언의 5라운드 TKO패. 도전자의 신분이 된 아데산야는 5개월 만에 성사된 리매치에서 2라운드 KO승을 거둔다. 
   
바닥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는 패자에게 (페레이라의 등장 퍼포먼스인) 활을 쏘는 격한 세리머니를 하던 아데산야는 갑자기 케이지 밖의 누군가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옆으로 기절하는 시늉을 한다. 알고보니, 울고있는 페레이라의 아들에게 ‘너희 아빠 이렇게 기절했다!’라면서 조롱을 한 거였다. 
   
과거 아데산야 선수가 페레이라의 펀치에 쓰러졌을 때 그 아들이 링 위에 올라와 기절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 딴엔 복수였던 거다. 기자회견에서 밝히길, 자신은 소심한 사람이라 그랬다고 하자 페레이라는 그땐 아들이 다섯 살이었고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면서 ‘어른의 불필요한 행동과 변명’에 불쾌감을 보였다. 그러자 아데산야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아빠가 하지 않아서 내가 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당해봐라?
   
재미난 것은 국내 격투기 팬들의 반응이었다. 본인 스스로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명명백백 ‘어른’ 아데산야의 그릇된 행동이지만, 충분히 이해한다는 입장이 꽤나 무게감 있게 한쪽을 형성했다. 무례한 잼민이는 참교육이 답이라는 말들이 쉽게 등장했다. 사연이 어떠하든 아쉽다고 여기는 게 공동체의 바람직한 정서 아니냐는 말보다 ‘통쾌한 복수’, ‘정의의 실현’이라는 추임새가 더 강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않는 게’ 더 큰 사회적 이득임을 의심하지 말자는 주장은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저 아이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다. 어른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못은 어디 사라지지 않는다. 행동에 책임지는 것과 ‘그러니 너도 당해봐라’는 건 전혀 다르다. 아이가 교훈을 얻었다고 치자. 그건 잘못과 사죄, 용서라는 단계가 아니라 상대가 잘못하면 ‘내가’ 어떻게 해도 된다는 앙상한 복수심일 거다. 이 문법에 기초한 폭력이 연일 뉴스에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층간소음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이를 보고 이해가 된다는 사람이 있다. 차가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보복운전을 한다. 그럴 만하다는 사람이 있다. 이러니, 주차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여성을 두들겨 팬 남성은 ‘상대가 내 배우자를 건드려서’ 그랬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한 남성이 여성의 얼굴을 달려와서 주먹으로 때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반전’이라는 느낌을 전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여성이 담배꽁초를 그 남자의 친구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있다면서, 때릴만한 맥락 그러니까 맛을 짓의 정황을 억지로 찾아낸다.‘그쪽이 잘못했으니 나는 때릴 수 있다’는 정서가 논리로 둔갑되면 대부분의 폭력은 ‘도긴개긴'으로 해석될 거다. 이는 '정글'이지 사회가 아니다. 개인에게 복수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건 상대의 잘못이 인공지능으로 판별되는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손님 갑질을 떠올려보자. 그 손님들, 자신들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기분 나빠서 되돌려주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다. 학교폭력은 당연히 가해자가 잘못이지만 속살을 파헤쳐보면 자신이 ‘정당하게’ 복수한다고 착각한다. ‘맞을 짓 했지?’라는 추궁이 폭력의 전단계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무서워서 총이라도 들고 다녀야 겠다
   
이미 복수는 현실이 되었다. 인터넷에서는 참교육이라는 추임새가 남발하는 서사가 인기 콘텐츠가 된 지 오래되었다. 얌체주차를 한 차의 앞뒤를 다른 차들로 막아버리고 이를 공유할 정도로 떳떳하다. 주차장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차주를 누가 두둔하겠는가. 하지만 무례함의 크기가 사회적으로 그어놓은 선을 넘어갈 이유가 될 수 없다.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가 실제로 검색되고 판매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층간소음 유발자를 이해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대응의 끝에 슬기로운 마무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끝에는 ‘합법적인 총기소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야구방방이를 들고 문을 박살내고 있다면, 이를 막을 더 큰 무기를 찾는 건 당연하다. 총이 허락된다면, 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대가 명명백백 잘못을 했다 한들, 사람들은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 약자일 때만 ‘뿌린 대로 거두리라!’면서 화를 낸다. 이성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이나 스토킹 등의 문제는 성별의 방향성이 뚜렷하다. 남성에서 여성 쪽으로 향한다. 그 반대는 쉽지 않다. 화난다고 다음 행동이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성별은 한다. 덜 무섭기 때문일 거다. 보복 운전도 마찬가지다. 보복 운전 당사자들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경차가 벤츠 막아서고 시비 걸고 트렁크에서 골프채 꺼내서 상대를 협박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그 반대는 많다. 그게 더러워서 큰 차 산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마찬가지로, ‘더러워서’ 총을 소지 할 거다. 어차피 이성으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총으로라도 자신을, 가족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선 괴물을 막을 더 강한 무기가 찾는 게 이성적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겠지. 정당방위였다고. 상대가 '총 맞을 짓' 했다고.  그래서 누구나 자신은 정당하다면서 총부터 꺼내겠지.
이성의 힘이 빈약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강한 무기를 찾고, 그런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여긴다 - 사진은 픽사베이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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