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가해자의 선생님입니다.
🔥안녕하세요, alookso 원은지입니다.
<지인능욕이 웬말이야> 프로젝트의 출발이 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해 12월, 얼룩소에 지인능욕 피해자 반디 님이 올린 글입니다.
'지인능욕'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게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반디의 이야기로 출발한 지인능욕 피해자와 연대자의 고발이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인능욕
“너 사진이 트위터에 올라온거 같아…”
평온했던 주말, 생각지도 못한 지인의 연락에 어안이 벙벙했다.
지인이 보여준 화면에는 내 얼굴이 나온 사진과 남성의 성기사진이 함께 게시돼 있었다. 근무하는 학교와 내 실명, 악질스러운 능욕 글도 함께였다.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지인능욕, 지인박제라는 키워드, 게시글의 좋아요는 천 개에 육박했다.
‘말도 안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게시글이 있을까 여러 키워드들로 게시글을 찾았다.
또 다른 게시글에는 내 얼굴 사진과 함께 내 치마 속을 몰래 불법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그리고 내 얼굴에 정액으로 추정되는 액체를 뿌린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제 교직생활 5년차이다. 그동안 거쳐갔던 학교와 제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에게 이런 짓을 한 학생이 누굴지 생각했다. 아니, 제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의 가까운 지인일지도 모른다. 설마 내 제자들이 이런 짓을 할리가 없다. 믿고 싶지않은 사실에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내 손으로 직접 능욕글을 찾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 친구들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게시글을 처음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계정과 연락이 닿았다.
학생인 척하며 계정 주인과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알아냈다. 범인은 우리 학교, 내가 가르치는 학년의 학생. 부정하고 싶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다.’
심장이 떨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있을 지 조차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누구를 의심해야하는지 감도 오지않았다. 범인을 찾아내도 제자일 그 학생을 처벌해야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이지만, 제자와 교사의 관계라니.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찾아내서 법적 처벌을 할 수 있을까.
#가해자와 피해자, 제자와 스승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뚜렷한 해결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 측에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학생들에게 사실을 공개하면 가해자가 숨어버릴까봐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했다. 정신의학과 약처방을 받으며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수업을 했다.
“선생님은 잘못 없어요, 우리가 본 선생님은 누구보다 교사로서 품행을 지키며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이에요. 자책하지 말아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료교사들의 위로와 응원이 나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책과 아이들에 대한 의심이 드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기분 나쁠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그때 그 아이인가? 그 순간에 나를 찍은 걸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게시글을 봤을까?
앞으로 나는 교사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혼자 방에 있을 땐 극단적인 생각까지 휩싸이게 되었다. 처방 받은 항우울제와 나를 위로해주는 가족, 친구들의 힘으로 버텼다.
증거를 모으기 위해 트위터에 내 이름과 지인능욕, 지인박제, 도촬(불법 촬영), 여교사 등의 키워드를 주기적으로 검색했다. 그 과정에서 가해 학생이 친구와 함께 불법 촬영을 했다는 사실과 바지를 입은 날엔 엉덩이를, 긴 치마를 입은 날엔 '몰카펜'을 몰래 던져 들키지않도록 치밀하게 촬영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여교사 '도촬방'이라는 텔레그램 단톡방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과 공유했다. 이 대화방에는 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신상과 얼굴, 불법 촬영 사진이 떠돌고 있는지 모르는 선생님들의 수많은 사진들과 능욕글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냥 묵인할 수는 없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않게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내야하지 않을까.
#내 꿈은 선생님, 앞으로도 그렇다
나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힘들었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나에게 큰 버팀목이자, 따뜻한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었다.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 간절히 노력했고, 감사하게 임용에 합격하였다.
힘들었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나에게 큰 버팀목이자, 따뜻한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었다.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 간절히 노력했고, 감사하게 임용에 합격하였다.
교단에서 만난 아이들은 사랑스러웠고, 아이들을 통해 나 스스로도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내게 교사가 천직이라 이야기했고, 나 역시도 교사로서의 삶에 감사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의심해야 한다. 가혹한 현실이다.
이 순간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상황을 피하고 덮으며 숨어버리는 것일까. 끝까지 가해자를 찾아내서 처벌을 받도록 만드는 것일까. 이 이야기들을 공론화해야할까. 그렇게 되었을때 내 마음은 괜찮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뻗어가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자는 것.
트위터의 지인능욕, 지인박제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면서 많은 10대 학생들이 피해자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스스로 인식도 못한 채 불특정 다수의 능욕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가해자는 대부분 주변의 10대 지인들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 대부분 스스로를 숨기며 이름을 바꾸고, 피해글이 확산될까봐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는데, 피해자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가해자를 찾다 결국 포기하고 만다.
이런 피해를 받은 학생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피해를 받은 우리는 잘못이 없다고, 우리는 떳떳하다고, 더 당당히 함께 서있자고.
선생님은 당당히 서있겠다고.
가해자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재미삼아, 또는 장난으로 올리는 지인능욕, 지인박제 글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이다.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깨닫고 깊이 반성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부탁드립니다.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의 가족, 친구,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피해자들이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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