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지식이란 무엇인가 - 20세기 초기 지성사의 맥락들
2024/02/20
무엇보다 문제는 새로운 학문관이나 방법론을 둘러싸고 사상적인 대결을 벌이기에는 국내외의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을미사변에 이은 아관파천으로 일본과 연계된 개화관료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고종과 관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균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개혁 주체 사이에 표면화되지 않고 있던 미래의 정체(政體)에 대한 이견(異見)이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사태는 민권 개념의 확산과 더불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반정부활동으로 이어지만, 1899년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고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반포됨으로써 일단락된다. 열강들로부터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 근대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한제국기의 황제권 강화는 그 정도가 심하여 근대국가체제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수 없었고 새로운 지식담론의 생산과 수용 또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러일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근대 지식의 수용과 생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학부 발간 교과서 수종, 민(民)보다 사(士)를 중심에 두었던 <황성신문>과 점차 개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 되어갔던 <제국신문>, 서포에서 출판한 10여 종의 서적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을사늑약은 독립협회 해산 이후 광무정권의 통제 하에 놓였던 근대화 담론의 존재조건을 반자율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통감부는 1907년 채결된 ‘한일신협정’에 따라 다와라 마고이찌(俵孫一)가 학부 차관으로 부임한 이후 ‘사립학교를 대폭 줄여 조선인들의 보통교육 기회를 차단하고 중등교육 및 실업․기술교육을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지적 저열화를 기도하는 우민화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한일관계 및 양국의 친교를 저해하거나 우국심 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