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9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 부작용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도시화, 산업화가 이루어지며 대표적으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기 시작하였죠.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1970년대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든 이들의 모습과 함께 이를 뒤따라가지 못한 하층민의 소외된 모습들이 작품에 드러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것들은 이어지고 있지만, 그 한 편에서는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손길을 뻗는 이들의 모습도 많이 보여지고 있지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차갑다고만, 혹은 따뜻하다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해득실만을 따지며 차가운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많은 반면, 코로나가 터지며 임대료를 인하하거나 받지 않는 등의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많았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는 두 가지 면모가 어우려져 있는 사회라고 생각이 듭니다.
누칼협.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덩달아 떠오르는 말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니 좋겠네.'라는 문장과 함께 덧붙는 말들이겠네요. '네가 좋아하는 일 하니 나보다는 낫네. 뭐가 힘들어. 잘 하는 일 하는게 얼마나 복받은 일인데.' 등등의 말을 들으며 힘들어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약 제게 그런 말을 한다면, 솔직히 저는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에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부러워하는 시선들에 맞서 힘들다는 말을 토해내기가 무척 힘들거든요.
누칼협이란 단어 자체는 다른 이에 대한 시기, 질투 등에서 시작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왜 찡찡대는거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도 못하는데. 이러한 생각들이 기저에 깔려 있어 상대의 상황을 미처 살피지도 못한 채 튀어나오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다 ...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차갑다고만, 혹은 따뜻하다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해득실만을 따지며 차가운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많은 반면, 코로나가 터지며 임대료를 인하하거나 받지 않는 등의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많았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는 두 가지 면모가 어우려져 있는 사회라고 생각이 듭니다.
누칼협.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덩달아 떠오르는 말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니 좋겠네.'라는 문장과 함께 덧붙는 말들이겠네요. '네가 좋아하는 일 하니 나보다는 낫네. 뭐가 힘들어. 잘 하는 일 하는게 얼마나 복받은 일인데.' 등등의 말을 들으며 힘들어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약 제게 그런 말을 한다면, 솔직히 저는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에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부러워하는 시선들에 맞서 힘들다는 말을 토해내기가 무척 힘들거든요.
누칼협이란 단어 자체는 다른 이에 대한 시기, 질투 등에서 시작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왜 찡찡대는거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도 못하는데. 이러한 생각들이 기저에 깔려 있어 상대의 상황을 미처 살피지도 못한 채 튀어나오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다 ...
아직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시야가 좁고 짧은 식견을 지닌지라, 저는 이런 조언을 주시면 언제든지 감사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더 배워가는 중이네요!
아닙니다. 제 글이 부족한 탓이지요. 이렇게 소통을 통해 의미가 잘 전달되어 무척 기쁘고 감사합니다.
앗. 웅보님의 댓글을 읽고선 제가 너무 지엽적으로 글을 읽은 것은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잘못 파악한 것 같네요. 댓글을 읽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몇 가지 의견을 덧붙힙니다.
첫째, 제가 언급한 공감은 사회의 온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히 개인은 모두 사회의 일부라는 의식 아래 반드시 작동해야만 하는 기능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특정 개인의 행위나 처지에 동의하고 포용하자는 의미가 아닌 상황 자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해결을 위한 움직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코인에 올인을 했건, 공시에 올인을 했건, 그 심리 자체에 동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크든 작든 사회문제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안들이지요.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둘째, 부동산, 코인, 유튜브 모두 일관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대박'을 노리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점이지요. 그들이 '대박'만을 노리게 된 것은 사회계층 이동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무의식, 의식적 인식 탓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사실에 가까우며 그 사다리가 없어진 것은 온전히 사회의 책임입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개개인을 탓하는 일은 그 의미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타인의 실패를 조롱함으로서 자신의 상황에 따른 불안함을 축소 시키려는 시도, 또 다른 하나는 해당 사안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시도로 보여집니다.
전자의 경우, 불안함 없는 인생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사회 여건에 따라 그 불안함은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기도 또는 허구의 것이 주입 되기도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적어도 한명한명 탈락하는 모습을 떨며 지켜보는 오징어게임 생존자와 같다고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모두 같은 배를 탄 처지에 누구는 성실하고 똑똑해서 살아남고, 누구는 게으르고 멍청해서 탈락했다고 구분 짓는 일은 지양 되어져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 개인의 행위와 그에 따른 책임에는 개인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이 투자를 위해 대출을 받았다면 그 대출은 개인의 책임 영역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과도한 투자 분위기를 조장하고 방조한 것은 사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 영역들이 교집합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자의 영역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작금의 상황은 그 사회적 책임이 아예 잊혀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닙니다. 제 글이 부족한 탓이지요. 이렇게 소통을 통해 의미가 잘 전달되어 무척 기쁘고 감사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몇 가지 의견을 덧붙힙니다.
첫째, 제가 언급한 공감은 사회의 온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히 개인은 모두 사회의 일부라는 의식 아래 반드시 작동해야만 하는 기능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특정 개인의 행위나 처지에 동의하고 포용하자는 의미가 아닌 상황 자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해결을 위한 움직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코인에 올인을 했건, 공시에 올인을 했건, 그 심리 자체에 동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크든 작든 사회문제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안들이지요.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둘째, 부동산, 코인, 유튜브 모두 일관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대박'을 노리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점이지요. 그들이 '대박'만을 노리게 된 것은 사회계층 이동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무의식, 의식적 인식 탓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사실에 가까우며 그 사다리가 없어진 것은 온전히 사회의 책임입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개개인을 탓하는 일은 그 의미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타인의 실패를 조롱함으로서 자신의 상황에 따른 불안함을 축소 시키려는 시도, 또 다른 하나는 해당 사안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시도로 보여집니다.
전자의 경우, 불안함 없는 인생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사회 여건에 따라 그 불안함은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기도 또는 허구의 것이 주입 되기도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적어도 한명한명 탈락하는 모습을 떨며 지켜보는 오징어게임 생존자와 같다고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모두 같은 배를 탄 처지에 누구는 성실하고 똑똑해서 살아남고, 누구는 게으르고 멍청해서 탈락했다고 구분 짓는 일은 지양 되어져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 개인의 행위와 그에 따른 책임에는 개인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이 투자를 위해 대출을 받았다면 그 대출은 개인의 책임 영역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과도한 투자 분위기를 조장하고 방조한 것은 사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 영역들이 교집합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자의 영역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작금의 상황은 그 사회적 책임이 아예 잊혀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시야가 좁고 짧은 식견을 지닌지라, 저는 이런 조언을 주시면 언제든지 감사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더 배워가는 중이네요!
앗. 웅보님의 댓글을 읽고선 제가 너무 지엽적으로 글을 읽은 것은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잘못 파악한 것 같네요. 댓글을 읽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