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소 더 레이스]에 관하여

권승준
권승준 인증된 계정 · 운수회사 직원
2023/03/16
1.
지난주 수요일부터 '얼룩소 더 레이스'라는 기획이 시작됐다. 시류에 편승해 '얼룩소 더 글놀이'라고 이름짓고 싶었는데, 현실과 (사장님과) 타협해 이런 이름으로 시작했다. 전에 했던 생산자 공모의 시즌2 격으로 준비한 기획이다.

2.
콘셉트는 몇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매주 6개의 주제를 얼룩소 운영진이 제시한다. 주제에 흥미있고 그 주제로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1주일 간 레이스를 벌인다. 참가자들은 얼룩소 보상시스템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천관율 에디터가 말한 글값이다. 부득이 순위를 매기고 그 중 1위는 200만원을 보상한다. 2~3위는 100만원, 4~6위는 50만원이다.

매주 주제의 절반이 바뀐다.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많았던 주제 3개는 다음주에도 이어지고, 빈 자리는 새로운 주제가 들어온다. 매주 6개의 주제가 계속 바뀌면서 불판처럼 깔리는 셈이다. 독자의 참여가 주제의 수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독자의 참여를 불러오는 기폭제는 결국 그 주제로 좋은 글을 쓴 필자들이다. 독자와 필자가 주고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키운다. 그렇게 주제들끼리 경합하며 불판이 굴러간다. 불판이 실제로 굴러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써놓고 보니 몇 문장보단 좀 길어서 민망하구만.

3.
전 직장이 신문사였다. 매일 신문을 만드는 기자와 데스크들이 제일 공들여 만드는 건 1면이다. 어느 신문사나 그럴 것이다. 어제 일어난 한국 사회의 모든 일 중 그 신문사 구성원(이라고 쓰고 당 지도부라고 읽고 싶은 마음이다)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1면에 실린다. 소위 말하는 아젠다 세팅이다. 이 아젠다 세팅을 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여하튼 이 1면을 통한 아젠다 세팅은 신문사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중요하다.

독자들은 신문 1면 읽으면서 본인이 이해하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어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한다. 사안의 경중을 가린다고 말해도 되겠다. 너무 많은 사건사고이슈를 모두 받아들이면 길을 잃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나 수많은 정보의 소음 속에서 신호를 찾고 싶어한다. 신문의 1면은 각 신문사가 보내는 신호다.  수신하고 말고는 독자의 마음이긴 하지만.

4.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라는게 있던 시절이 있었다. 포털이 레거시 미디어 시장을 잠식하면서 아젠다 세팅 기능 중 많은 부분이 이 실시간 검색어로 넘어갔다. 정확한 알고리즘은 잘 모르지만, 누구나 실시간 검색어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관심가지는 주제나 이슈의 순서. 이 단순한 메커니즘이 가진 아젠다 세팅 기능은 아주 강력하게 잘 작동했다.

그리고 실시간 검색어는 레거시 미디어와 반대 방향에서 아젠다를 세팅했다. 조작 논란 등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검색어를 입력하고 관련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등 참여를 통해 순위가 결정됐다. 언론사가 아니라 독자들이 아젠다를 세팅한 것이다.

5.
문재인 정부가 했던 여러 정책 중 미디어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도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청와대 청원게시판을 꼽겠다. 스타트업 사투리로 프로덕트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청원게시판 역시 아주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운영됐다. 누구나 청원할 수 있다. 어떤 청원이든 그에 동의나 지지, 공감 등을 표한 사람이 20만명이 넘으면 청와대가 나서서 답변을 해준다.

이 청원게시판도 상당히 잘 작동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게시판이 청와대라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 가진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있었던 덕분이다. 일단 20만명의 동의를 얻어서 청와대의 반응을 끌어내면 그 청원은 그 자체로 기삿거리가 됐다. 청와대가 나섰으니까. 나중에는 20만명을 넘기 전에 화제를 모으는 단계에서 기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간과한 포인트를 잘 짚어낸게 김동환님이다. 내 기억으로 김동환님은 당시에 청원게시판이 미디어 기능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지적하면서 "앞으로 본인의 아젠다를 얼마나 대중들에게 잘 소구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취지의 논평을 한 적 있다(제 기억이 맞나요 동환님?)

얼핏 보면 많은 이들이 동의해야 청와대가 반응하고 이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원게시판은 실시간 검색어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일단 누군가의 청원이 있어야 동의도 존재한다는 지점이다. 즉, 어떤 아젠다를 제시하면서 그걸 대중에게 설득력있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적어도 20만명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청원게시판은 작동할 수 있었다. 

6.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도 청원게시판도 이상적으로 잘 작동한 미디어는 아니다. 부작용과 단점도 많았고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미디어 시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두 미디어가 가진 어떤 본질적인 기능은 여전히 미디어 시장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며 잘만 살리면 잘 작동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7.
10년 넘게 신문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갖고 있다. 실수도 실패도 많지만(그 실수와 실패 중 일부는 내가 저지른 것이기도 하다), 레거시 미디어 조직과 종사자들은 훈련된 역량을 갖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보를 발굴하고 평가하고 가려내며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해 전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오랜 세월 레거시 미디어가 쌓은 조직적 지식과 역량을 얼룩소같은 스타트업이 짧은 시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사실 얼룩소가 그런 길을 가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도 아니다. 얼룩소는 다른 방향에서 레거시 미디어가 잘 하지 못하거나 안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선상에서 시도하려는 것을 하려는 기업이다(맞나요 사장님?)

8.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와 청와대 청원게시판이 구현했던 어떤 본질적인 미디어 기능 역시 그 중 하나다. 둘 다 기존 레거시 미디어가 하지 않았거나 못하는 형태로, 그러니까 레거시 미디어의 반대 방향으로부터 미디어 기능을 구현했다. 독자들에게 아젠다를 세팅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으며, 자신의 아젠다를 가진 이들이 대중을 상대로 직접 자신의 아젠다를 어필하고 유세하며,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띄울 수 있는 기회를 줬다.

9. 
아주 거칠지만, 얼룩소 더 레이스가 시작하려는 미디어 기능의 핵심은 그 두 가지 본질을 어떻게든 구현해보려는 작은 첫 걸음이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보면 알겠지만 사실 여러모로 부족한 기획이며 프로덕트다. 아직 어설프고 허점이나 불편한 부분도 있다. 지금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포기하고 미래의 과제로 남겨둔 부분도 많다.  글값이라고 부르는 상금이 노골적이라고 싫어할 이들도 있을 것이고, 경쟁이라는 형식이 불편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10.
그럼에도 얼룩소 더 레이스는 여하튼 독자들의 참여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아젠다를 찾아보려는 기획이다. 동시에 각자 자신만의 중요한 아젠다를 세상에 유세하고 그걸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이들 하나하나가 미디어가 되는 길을 열어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프로덕트다. 처음이라 얼룩소 운영진이 매주 주제를 제시하지만, 주제의 생명력은 전적으로 필자와 독자 몫이다. 얼룩소는 판만 깔 뿐이다.

그리고 글값 200만원은, 그 길을 닦기 위한 아스팔트같은 것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결국 20세기 초의 선구적인 키보드 워리어였던 루쉰 선생의 말처럼, 사람들이 많이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되는 법이다(루 선생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경제와 K팝, 그리고 각종 영상 콘텐츠에 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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