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67편 - 호주 역사상 최대 미스테리 사건 헤럴드 홀트(Harold Holt, 1908~1967) 총리의 실종
2024/05/01
호주에서 수많은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당시 현직 총리인 헤럴드 홀트(Harold Holt, 1908~1967) 총리의 실종 사건이 아닐까 싶다. 홀트는 1908년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주 스텐모어에서 토마스 홀트와 올리브 홀트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년으로 성장한 이후 멜버른의 퀸즈 칼리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한 홀트는 1930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29년 뉴욕발 대공황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는 것이 늦어지기도 했지만 안정된 일자리에 취직함과 더불어 1936년에는 사업 파트너의 딸인 로라 트링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생활이 점차 안정을 찾게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해럴드 홀트는 대공황의 여파로 1931년에 창당되어진 보수주의 정파 호주연합당에 입당했다. 1934년의 호주 연방 선거와 1935년 3월의 선거에 연이어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35년 8월의 포크너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공급개발부 장관, 과학산업연구부 장관, 공군 및 민간 항공부 장관, 노동행정부 장관을 역임하고, 어린이 세금 감면을 실시한 홀트는 1945년 호주연합당이 해체되자, 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치 인생을 이어갔고 1949년 포크너 선거구를 떠나 히긴스 선거구에서 다시 한 번 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노동행정부 장관을 또 한 번 역임했다.
그리고 이민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6년엔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홀트는 경제 정책을 세우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이어 경제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1966년까지 장관직을 연임했다. 또 1966년 1월 27일에 호주 연방의 제 17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홀트는 호주 총리로 일하며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철폐하는데 앞장 섰다. 이후 호주 예술 위원회를 설립하여 호주의 문화, 예술을 이민자 컨셉으로 완전히 정착시키는 성과를 세운 바 있다.
그는 10진법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호주 파운드를 현재의 호주 달러로 교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을 도와 호주군을 파병했다. 서방 국가들 대다수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가운데 국공내전 이후 대만 주권 미정론을 구실로 마비되었던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해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독보적인 친서방 행보를 보였다. 국공내전 이후 주중 호주 대사관은 중국에서 철수했고 대만에 추가로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주 호주 대만 대사관은 철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대사가 임명되지 않으면고 영사만 주재하는 모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중공과의 수교가 끊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장개석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호주가 중국국민당 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대만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6년의 연방 총선에서 국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압승했으며 1967년 초 부터 경제 무역 정책에 대하여 연정 내부에서 반대 의견이 생기면서 당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지 시작했다. 이어 시드니와 브리즈번 거리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신인 정치인의 연설을 방해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10월에는 소속당인 연합당의 상원 의장이 VIP용 비행기를 남용한 것에 대해 이에 대한 홀트 총리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결국 홀트 내각은 1967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참패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홀트의 형편없는 지도력과 건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가 시작했다.
그러던 1967년 12월 17일 일요일 아침, 홀트는 그의 이웃이자 동시에 불륜 상대인 마저리 길레스피, 그녀의 딸 바이너, 딸의 남자친구 마틴 심슨, 길레스피 가족의 친구인 앨런 스튜어트 등과 함께 빅토리아 주 포인트 네핀에 위치한 셰비엇 해안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당일 오전에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사나웠음에도 불구하고 홀트는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홀트는 유년 시절 때 수영을 배운 바 있었고 고등학생 때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과신한 나머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의 시야에서 곧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는 호주에서 대단히 큰 일로 현직 총리가 실종된 사건이라 매우 중대하게 다루어졌다.
이후 오후 3시에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가 들어와 빅토리아 주 경찰이 해안경비대와 함께 수색을 하게 된다. 하지만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인해 수색에 난항을 겪으면서 12월 20일에는 수색을 중단하게 된다. 이어 다시 수색을 재개했으나 경비함정과 헬리콥터, 잠수부 등을 동원한 얼마 간의 해상 작전 끝에 결국 호주의 해안 경비대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1968년 1월 5일에 수색을 종료하게 된다. 그렇게 가족들은 홀트 총리가 죽었다 간주하고 12월 22일에 장례식을 멜버른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가지게 된다. 당시 이 때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었다. 호주는 대한민국의 우방 중 하나였으며 6.25 때 파병국이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한국과 호주 모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던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수영선수 출신이어서 수영 실력이 월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실종 직전까지도 어딘가에서 수영하다가 죽을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더불어 수영에서 치명적인 어깨의 부상으로 인해 모르핀을 처방받았던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홀트는 각종 지병이 겹쳐, 수영 도중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이 주류로 나타난다. 그러나 호주의 대중 매체들은 홀트가 총리로서 삶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가능성에 타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2007년에는 홀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기자가 홀트가 자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부 현지 전문가에 의하면 상어에게 잡아 먹혔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작가 앤서니 그레이는 “홀트가 중국의 스파이”라며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웠던 홀트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잠수함을 타고 중국에 다시 돌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생전 홀트의 대중국에 대한 정책을 볼 때 앤서니 그레이의 의견은 호주 국내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홀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중국 요리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련이 파견한 군사 고문단에 섞여 들어온 KGB, 내지는 소련군 첩보부대원들이 북베트남으로 끌고 갔거나 다시 거기에서 소련 본국으로 끌려가 굴락에 감금당해 그곳에서 죽었다는, 천안함이 잠수함과 충돌해서 침몰 되었다는 설과 동급인 황당한 가설도 재기 되었다.
이 외에도 홀트가 마약중독자로 약에 취해서 익사했다는 설도 등장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호주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는데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CIA가 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설도 나왔다.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 예전부터 UFO가 자주 출몰했던 지역이라 외계인이 납치한 후 생체실험하고 살해당했다.”라는 등 온갖 음모론들이 등장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아마도 서핑 중 갑작스러운 이안류 등 파도의 변화로 쓸려가 그대로 익사했거나 그런 상태로 상어의 공격받아 죽었을 것이라는 게 가장 타당한 설이라 본다.
실제로 호주 앞 바다에는 어디든 상어가 많이 출몰하고 상어는 서퍼를 물개로 착각해 자주 공격한다. 특히 당시 상어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호주 해안가의 특징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와 같은 몸의 건강 이상으로 즉사 후 시신도 바다로 가라앉으며 유실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태평양 바다를 모두 뒤져도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을 싣고 있다. 당시 현직 총리가 갑자기 실종된 전 세계 역사로 볼 때 몇 없는 사건이고 호주에서 풀지 못한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도 그의 실종을 두고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후 생활이 점차 안정을 찾게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해럴드 홀트는 대공황의 여파로 1931년에 창당되어진 보수주의 정파 호주연합당에 입당했다. 1934년의 호주 연방 선거와 1935년 3월의 선거에 연이어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35년 8월의 포크너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공급개발부 장관, 과학산업연구부 장관, 공군 및 민간 항공부 장관, 노동행정부 장관을 역임하고, 어린이 세금 감면을 실시한 홀트는 1945년 호주연합당이 해체되자, 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치 인생을 이어갔고 1949년 포크너 선거구를 떠나 히긴스 선거구에서 다시 한 번 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노동행정부 장관을 또 한 번 역임했다.
그리고 이민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6년엔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홀트는 경제 정책을 세우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이어 경제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1966년까지 장관직을 연임했다. 또 1966년 1월 27일에 호주 연방의 제 17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홀트는 호주 총리로 일하며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철폐하는데 앞장 섰다. 이후 호주 예술 위원회를 설립하여 호주의 문화, 예술을 이민자 컨셉으로 완전히 정착시키는 성과를 세운 바 있다.
그는 10진법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호주 파운드를 현재의 호주 달러로 교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을 도와 호주군을 파병했다. 서방 국가들 대다수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가운데 국공내전 이후 대만 주권 미정론을 구실로 마비되었던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해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독보적인 친서방 행보를 보였다. 국공내전 이후 주중 호주 대사관은 중국에서 철수했고 대만에 추가로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주 호주 대만 대사관은 철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대사가 임명되지 않으면고 영사만 주재하는 모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중공과의 수교가 끊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장개석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호주가 중국국민당 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대만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6년의 연방 총선에서 국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압승했으며 1967년 초 부터 경제 무역 정책에 대하여 연정 내부에서 반대 의견이 생기면서 당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지 시작했다. 이어 시드니와 브리즈번 거리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신인 정치인의 연설을 방해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10월에는 소속당인 연합당의 상원 의장이 VIP용 비행기를 남용한 것에 대해 이에 대한 홀트 총리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결국 홀트 내각은 1967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참패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홀트의 형편없는 지도력과 건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가 시작했다.
그러던 1967년 12월 17일 일요일 아침, 홀트는 그의 이웃이자 동시에 불륜 상대인 마저리 길레스피, 그녀의 딸 바이너, 딸의 남자친구 마틴 심슨, 길레스피 가족의 친구인 앨런 스튜어트 등과 함께 빅토리아 주 포인트 네핀에 위치한 셰비엇 해안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당일 오전에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사나웠음에도 불구하고 홀트는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홀트는 유년 시절 때 수영을 배운 바 있었고 고등학생 때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과신한 나머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의 시야에서 곧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는 호주에서 대단히 큰 일로 현직 총리가 실종된 사건이라 매우 중대하게 다루어졌다.
이후 오후 3시에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가 들어와 빅토리아 주 경찰이 해안경비대와 함께 수색을 하게 된다. 하지만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인해 수색에 난항을 겪으면서 12월 20일에는 수색을 중단하게 된다. 이어 다시 수색을 재개했으나 경비함정과 헬리콥터, 잠수부 등을 동원한 얼마 간의 해상 작전 끝에 결국 호주의 해안 경비대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1968년 1월 5일에 수색을 종료하게 된다. 그렇게 가족들은 홀트 총리가 죽었다 간주하고 12월 22일에 장례식을 멜버른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가지게 된다. 당시 이 때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었다. 호주는 대한민국의 우방 중 하나였으며 6.25 때 파병국이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한국과 호주 모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던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수영선수 출신이어서 수영 실력이 월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실종 직전까지도 어딘가에서 수영하다가 죽을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더불어 수영에서 치명적인 어깨의 부상으로 인해 모르핀을 처방받았던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홀트는 각종 지병이 겹쳐, 수영 도중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이 주류로 나타난다. 그러나 호주의 대중 매체들은 홀트가 총리로서 삶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가능성에 타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2007년에는 홀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기자가 홀트가 자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부 현지 전문가에 의하면 상어에게 잡아 먹혔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작가 앤서니 그레이는 “홀트가 중국의 스파이”라며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웠던 홀트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잠수함을 타고 중국에 다시 돌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생전 홀트의 대중국에 대한 정책을 볼 때 앤서니 그레이의 의견은 호주 국내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홀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중국 요리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련이 파견한 군사 고문단에 섞여 들어온 KGB, 내지는 소련군 첩보부대원들이 북베트남으로 끌고 갔거나 다시 거기에서 소련 본국으로 끌려가 굴락에 감금당해 그곳에서 죽었다는, 천안함이 잠수함과 충돌해서 침몰 되었다는 설과 동급인 황당한 가설도 재기 되었다.
이 외에도 홀트가 마약중독자로 약에 취해서 익사했다는 설도 등장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호주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는데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CIA가 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설도 나왔다.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 예전부터 UFO가 자주 출몰했던 지역이라 외계인이 납치한 후 생체실험하고 살해당했다.”라는 등 온갖 음모론들이 등장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아마도 서핑 중 갑작스러운 이안류 등 파도의 변화로 쓸려가 그대로 익사했거나 그런 상태로 상어의 공격받아 죽었을 것이라는 게 가장 타당한 설이라 본다.
실제로 호주 앞 바다에는 어디든 상어가 많이 출몰하고 상어는 서퍼를 물개로 착각해 자주 공격한다. 특히 당시 상어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호주 해안가의 특징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와 같은 몸의 건강 이상으로 즉사 후 시신도 바다로 가라앉으며 유실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태평양 바다를 모두 뒤져도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을 싣고 있다. 당시 현직 총리가 갑자기 실종된 전 세계 역사로 볼 때 몇 없는 사건이고 호주에서 풀지 못한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도 그의 실종을 두고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