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용감한 목사님의 소천
2023/02/05
임보라 목사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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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가문’ 따위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코웃음부터 나는 처지이지만,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 ‘가문’에는 130년쯤 전부터는 제사가 없다. 두만강 근처에 살다가 만주로 넘어갔던 내 증조부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제사를 폐했던 것이다. 즉 나는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에 흔하지 않은 4대째 기독교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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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 말하기는 하고, 종교란에 꼬박꼬박 기독교를 채워 넣기는 하지만 통상 한국에서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인’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십일조 같은 건 평생 해 본 적 없고, 예수천국 불신지옥 류의 선무당같은 신앙고백을 해 본 적도 없다. 주일성수도 그다지 엄하게 지키지 않았고, 대학 입학한 이후에는 교회와도 거의 담을 쌓았다. 그래도 무슨 교회에든 적을 두어 달라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쇠귀에 성경 읽기쯤으로 대응하다가 찾은 교회가 향린교회였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그 교회에서도 이방인이 됐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사반세기를 교인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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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는 기독교 장로회 소속이다. 요즘 분위기는 또 다르다지만 기독교 장로회, 곧 기장은 한국 개신교의 진보성을 독보적으로 담보했고, 향린교회는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 맨 앞 대열에 끼어 있었다. 앞에서 ‘습관처럼’ 이 교회의 신도였다고 한 이유는 이 교회의 충실한 신도였다기보다는 역력한 ‘날나리’였기 때문이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는 않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향린교회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불경하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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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는 ‘사회 선교’에 관심이 많은 교회였고, 교회에 나오다 보면 당시의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탄핵 촉구 촛불 시위 때는 교회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었고, 뉴스를 장식한 여러 사건과 현장,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조우했다. 사회적 이슈가 교회 안에서 불거져 갑론을박이 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 중 하나의 예를 들면 2012년 있었던 동성 결혼식 대여 무산 사건...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