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축 사회
나의 혐의는 본국을 수치스러워함이라. 인텔리 세태를 업신여기는 내 주제가 우스울 게요.
나는 21세기 언어로 갤러리 족이다. 노쇠하신 부모님 집에 얹혀산다. 천운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치명적으로 나는 현세에 부적합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떤 피자 드릴까요?”
판매하러 매장 앞에 나오면 나는 독보적인 견자가 된다. 저이는 쇼핑 카트 뿐 아니라 출생에서 임종까지 똑같다.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
본능 밖에 없는 아이가 뭘 안다고 묻는 걸까? 인간과 금수의 확증된 차이점은 제어 능력의 유무다. 자아조차 제어 못하는 이는 금수나 다를 바 없다. 아이인 경우에는 인간보다는 금수에 가까운 시기이다. 아이는 발육과 동시에 매 순간마다 선택에 따라 진정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진정한 금수가 되기도 한다.
저이가 보는 그대로 나의 장래는 불안전하고 불확실하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오늘도 꾸역꾸역 영위한다.
저이는 돈을 신봉한다. 돈만 주면 영혼까지 팔 기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저이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답게 한평생 살 수 있긴 한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분이자 인격이다. 월급이 백만 원 안팎인 나의 신분은 농노이고 미천한 인격을 지녔다. 저이가 시키면 즉각 해야 한다. 반항하는 즉시 생계는 위협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 운영 방식은 굽실대면 자유고 직간하면 방관이다. ‘불법만 아니면 네 멋대로 해라.’ ‘죽든지 말든지 그딴 건 부덕한 네 사정일 뿐이다.’
학년이 오를수록 방목되는 가축 중엔 제 길을 정진하는 이가 있는 반면 갈팡질팡 이별하는 이가 있다. 차마 이별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갈망하다 날지도 정착하지도 못한다. 저이의 대부분은 정착을 선택하지만 나는 날고 싶어도 날개가 없다.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 사회의 두드러진 상징이다. 궁핍한 이는 곡간을 채우려고 돈을 벌고 유복한 이는 욕망을 채우려고 돈을 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