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이야기] "세종대왕도 여자지?"

성소영
성소영 · 에디터
2024/04/08
Unsplash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확인한 날, 책장을 정리했다. 어쩐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은 책장의 가운데 칸, 1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키의 내가 앞에 서면 책등이 직선으로 눈에 들어오는 칸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여성 작가들의 책을 모아 넣었다. 정희진, 은유, 벨 훅스, 버지니아 울프,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이 나란히 줄지어 나를 지켜봤다. 

하루는 물려 받은 동화책을 하나씩 펼쳐보고 전래동화를 솎아냈다. 무구한 소녀가 인당수에 빠져 죽고, 마을의 제물로 바쳐지고, 왕자와 결혼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해피엔딩인 이야기들이었다. 아이의 옷가지와 물품들도 흰색, 노랑색, 하늘색을 골랐지만 그것만큼은 이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후로 선물받은 모든 물건이 분홍색이었으니 말이다.

아이가 젠더에 갇혀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 어떤 한계도 틀도 없이 타고난 모양대로 쭉쭉 자랐으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돌아보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으면 했다. 출산 전의 고민과 준비가 무색하게도 아이가 태어난 후 맞닥뜨린 가장 큰 복병은 나였다. 하얀 찹쌀떡 같은 아이를 바라보면 왜이렇게 가슴이 뜨끔뜨끔한지. “너무 예쁘다”라는 말이 순식간에 목울대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론 맥없이 실패하는 날도 아주 많았다. 

나의 걱정과 달리 아이는 자기만의 세상을 멋지게 만들어갔다.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젠더문화에 눈을 떴지만 요술봉을 흔들며 공룡 흉내를 냈고, “공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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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매체에서 글쓰고 인터뷰하는 프리랜서 에디터. <우리 같이 볼래요?(공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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