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황허강 폭파, 짙어지는 암울함
2024/11/02
[3]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폭파된 황허강, 우한 함락
일본군은 우한을 공격하기에 앞서 '정저우'를 먼저 획득해야 했다. 이 도시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두 간선 철도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정저우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우한에 이어 시안마저 위기에 처할 터였다. 5월 말, 일본군은 정저우에서 겨우 4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어떻게 해서든 그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저우와 우한을 최종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본군의 진격 속도만이라도 늦춤으로써, 우한에서의 최후 항전 및 '충칭'으로의 철수 준비 시간 등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만한 방안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했다. 고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제1전구 사령관인 '청첸'이 뜻밖의 방안을 제시했다. 요지는 "물로 군대를 대신하자"라는 것이었다.
중국 중부 지역에는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황허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군은 우한에 진입하기 위해선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청첸은 황허강의 물길을 통제하는 (정저우 주변부에 있는) 거대한 제방에 구멍을 뚫자고 했다. 그렇게 한다면 대홍수가 발생해 일본군의 진격을 획기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커다란 문제점이 병존했다. 대홍수의 여파로 중부 지역 대부분이 침수되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장제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제방 폭파'였다. 장제스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한이라는 주요 도시 하나가 신속하게 넘어가는 것은 물론 국민당 지도부도 충칭으로 제때 철수하지 못해 사로잡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새 일본군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신속한 폭파가 이뤄져야 했다....
저서로 [정변의 역사], [암살의 역사], [숙청의 역사-세계사편],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