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덕
2023/08/24
1. 영화 <비밀의 언덕>을 봤다. 어떤 평론가의 말마따나 '과거의 내가 동시상영되는 듯한 영화'였다. 1996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5학년 소녀 '명은'이 몇 번의 글쓰기 대회에 나가게 되는데….
2. 기억력이 매우 안 좋은 편이다. 남들보다 심하게 유년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비밀의 언덕>은 내가 삭제한 줄 알았던 유년의 디테일을 끌어낸다. 영화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명은이 문방구에서 정성스레 선물을 포장하며 시작한다. 그걸 보고서야 나도 '아 그땐 그랬지' 싶었다. 우리 동네 문방구 아저씨도 내게 포장지 위에 붙일 별 모양의 장식 리본을 직접 고를 수 있게 해 줬다. 꿉꿉한 먼지와 차갑고 축축한 종이 냄새가 가득하던 곳. 사십 년도 넘게 운영하던 <우리 문구>는 몇 해 전 문을 닫았다.
3. 자신이 쓴 글의 파장을 걱정하며 내복 차림으로 고민하는 작은 머리의 명은이를 보고선 어떤 새벽이 떠올랐다. 걱정이 유독 많은 날은 자다자도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도 깨지 않은 푸른 새벽에 혼자 깬 나. 천장만 보고 한숨을 폭 쉬던, 온 세상 크기의 고민을 하던 나. 붉은 악마 티셔츠 차림의 나. 나는 항상 나이 먹는 게 좋았다. 매해 고민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니 전보단 살만해졌다. 그런 노하우가 가장 적은 초등학생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치열했다. 150cm도 안 되는 어린이의 어깨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명은이처럼.
4. 나도 명은처럼 글을 쓰는 아이였다. 환경보호의 날이든 과학의 날이든, 명은처럼 주제에 맞게 적당히 좋아할 만한 윤리적 글을 쓰고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