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와 영향

송치현 · 인문학도
2024/02/05
1. 개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의 군인 겸 정치인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초대 내무경을 지내며 사실상 근대 일본 최초의 총리 역할을 한 오쿠보 도시미치, 판적봉환, 폐번치현, 단발령 등 신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본인은 이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주목하여, 이 인물이 근대 일본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여 보고자 했다.

2. 생애

-메이지 유신 이전 생애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 1월 23일, 사쓰마국 가고시마현 가지야초(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가지야초)에서 하급무사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열여섯 살 때 번의 작은 직책을 맡아 관직에 나아간 뒤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측근이 되었는데, 에도 막부의 14대 쇼군 옹립 당시 주군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였다가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최종적으로 쇼군이 되자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토막파(반막부파 유신지사)의 주축으로 활약했고, 1866년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소개로 조슈번의 토막파 지도자 이와쿠라 도모미를 만나 비밀리에 사쓰마-조슈 동맹(삿초동맹)을 맺기도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 사쓰마번 토막파 인사들은 1866년 에도 막부의 두 번째 조슈 정벌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에도 막부 타도와 황정복고의 기치를 본격화하고, 조슈번 토막파 인사들과 함께 1867년 10월 14일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같은 날, 에도 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모든 정치적 권한을 봉환하겠다는 상주문을 올림에 따라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대정봉환 이후에도 막부 세력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음에 불만을 품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로 토막파 및 급진파 공경들이 모의하여 1867년 12월 9일 각 번에서 모인 군사들을 이끌고 무진전쟁을 일으켜 궁정을 장악한 뒤, 좌막파(친막부파)를 제외한 모든 공경들을 소집하고 황정복고를 선언하였다.

-정한론

메이지 유신 이후 삿초동맹의 유신지사들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번벌 정치를 해오고 있던 시기인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참의 겸 육군 원수라는 요직을 맡아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새 정부의 정책을 만드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사쓰마 사족들은 사족 중심의 개혁을 원하였지만, 또 다른 축인 조슈 파벌은 황족과 귀족을 제외한 기존의 사족 중심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일본인을 하나의 국민으로 규합하는 방향의 개혁을 주도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행된 폐번치현(행정구역을 봉건적 번에서 근대적 현으로 전환), 금록공채(옛 번 소속 무사들의 봉록을 일시금인 공채로 지급), 폐도령(군경 제외 모든 이들의 도검 착용 금지), 징병제(사족이 아닌 다른 일본인들에게 병역 의무 부여) 등의 정책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족층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 결과 사족층의 불만이 메이지 정부를 향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불만은 1873년 6월,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 때 메이지 신정부 수립 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 난항에 봉착했을 때부터 시작된 정한론(한반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국력을 배양하자는 주장. 정한론 자체는 에도 막부 말기에 나타났다.)의 대두와 결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본인을 조선 사절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후 그의 조선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파의 관료들의 반대와, 태정대신 대리직을 맡고 있던 이와쿠라 도모미가 천황에게 한 요청의 결과로 조선 파견이 무기한 연기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병에 걸렸다며 관직에서 사직한 뒤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하였다.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사직한 소에지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도 신페이 등은 모두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들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에 진심으로 동조하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조선과 외교적으로 갈등을 빚던 당시 정세 속에서 조선 사절 위치를 이용하여 고의적으로 조선과의 분쟁을 일으켜 국내 사족들의 불만을 조선과의 전쟁으로 해소하려 한 정한론자라는 평가가 정설이다.

-세이난 전쟁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가고시마현은 다른 현들보다 사족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옛 사쓰마 지역이 전국시대부터 가신단이 꾸려진 지역이었던 만큼 가신단의 규모도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현의 허가를 받아 가고시마 전역에 사족들을 교육하기 위한 사학교와 그 분교들을 설립하고, 농경지를 개간해 나가며 실업한 사족들의 자급자족을 꾀하는 한편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학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칭해지며 3만 명에 달하는 가고시마의 가장 큰 파벌이자 사병집단으로 성장했는데, 신정부는 사학교당과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감시체제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러한 행적을 보이고 있던 1877년은 징병제 이후 군무에서 배제되고 폐도령으로 검을 차는 무사라는 자존심까지 잃어버린 이래 최고조에 달한 무사들의 불만이,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구 사족층의 반란으로 폭주하는 상황이었고, 만일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학교당의 사족들이 거병하면 최악의 경우 기존의 반란 세력들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집결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정부의 우려대로, 사쓰마 파벌은 조정의 간신들을 물리치고 천황에게 사이고의 충의를 증명하고, 국민개병제로 편성된 신정부의 평민 군대의 무력함을 입증하여 사족의 군사적 입지를 회복하고, 최종적으로는 군사력을 통한 기득권과 정국 주도권 획득을 목표로 거병하였고, 1877년 2월 21일 구마모토성에서 정부군 정찰대의 선제 발포에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응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세이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이고 군은 구마모토 성 전투를 시작으로, 타바루자카 전투, 와다고에 전투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사쓰마 군대의 무장은 정부군의 무장에 비해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사이고 군은 와다고에에서 정부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본진인 가고시마현의 시로야마로 패주한 뒤, 가고시마 시민들의 봉기군과 합류하여 세력을 재정비했으나, 정부군이 구축한 5중 포위망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9월 24일 정부군의 총공격으로 사이고 군은 괴멸하였으며, 패배를 직감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 자살했다. 당시 일본 사족 세력 중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지던 사이고 군이 패배한 후 기승을 부리던 사족 반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 등 정부 요인들이 세이난 전쟁을 전후로 대거 사망함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사족들은 권력 투쟁 방향을 무력 저항 대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환하여, 일부 번벌들이 장악한 정부를 양당제의 입헌군주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3. 영향

-일본 좌우익의 공조상으로서의 사이고 다카모리

일본의 사상사학자인 마쓰모토 켄이치는 본인의 저서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에서 일본 좌우익을 세계 보편적 좌우익과는 구분되는 특수한 집단으로 정의하며, 일본 좌우익의 공조상을 사이고 다카모리로 진단한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들어선 삿초 번벌정부를 이끌던 오쿠보 도시미치 파벌은 체제수호파일 뿐이며, 일본의 좌우익은 모두 반체제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등장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쿠보 파벌은 제국주의자이자 팽창주의자였고, 그들의 목표는 조국 근대화, 부국강병으로, 근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급속하고 인위적인 근대화는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과 가치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메이지 신정부의 급속한 근대화 기조에 의해 소외된 사족들을 대표하여 반체제의 기치를 올린 것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신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세이난 전쟁의 종결과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후, 메이지 번벌정부에 저항했던 세력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결집하게 되고, 이후 분화하게 되는데,

한때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정한론을 내세우다 사직하기도 한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사직 직후부터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였고, 민권 그 자체보단 사족의 권력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그는 세이난 전쟁 이후, 이토 히로부미 파벌이 정권을 잡자 체제 보완적 야당인 자유당을 만드는 형식으로 번벌과 결탁하였다. 마쓰모토 켄이치는 이들을 ‘헌정 리버럴’이라 명명하며, 이때 형성된 헌정 리버럴 세력이 현재의 일본 자민당 정권으로까지 계승되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한편, 기존 체제수호파와 결탁한 이타가키의 자유민권운동 우파 세력과는 달리, 반체제 성향을 잃지 않은 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일본에 수입해 들여오며 자유민권운동의 이론 기반을 만든 나카에 초민으로 대표되는 자유민권운동 좌파와, 국내의 체제를 개량하기 위해선 전통을 내세우고, 외부 세력의 혼란을 조장하여, 경각심을 가지게 해서 민족을 뭉치게 해야 한다는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였고, 이들이 각각 일본 좌우익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이후 나카에 사상은 나카에 초민의 제자 고토쿠 슈스이의 평민사 세력에 계승되어 사회주의, 아나키즘으로 발전되었고, 도야마 사상은 우치다 료헤이와 미야자키 토텐 같은 신해혁명을 지원한 대륙낭인들의 혁명수출사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마쓰모토 켄이치의 평이다.

요약하자면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이타가키로 이어지는 일본의 근대화 노선에 민중의 권리를 대변하며 반발한 것이 좌익, 민족과 전통을 내세우며 반발한 것이 우익인데, 이 모든 반발의 시초가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였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네이버 두산백과 ‘사이고 다카모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7761&cid=40942&categoryId=33414
2) 네이버 두산백과 ‘세이난 전쟁’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6880&cid=40942&categoryId=39947
2) 박석순 외 4인, 일본사(미래엔)
https://terms.naver.com/list.naver?cid=62089&categoryId=62089
3) 네이버 한국근현대사사전 ‘정한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07962&cid=62089&categoryId=62089
4) 마쓰모토 켄이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36011975?query=%EC%9D%BC%EB%B3%B8%20%EC%9A%B0%EC%9D%B5%EC%82%AC%EC%83%81%EC%9D%98%20%EA%B8%B0%EC%9B%90%EA%B3%BC%20%EC%A2%85%EC%96%B8&NaPm=ct%3Dlo9mzsew%7Cci%3Da0739eeff765f9e3c8db86d75d2c2b1c111b8173%7Ctr%3Dboksl%7Csn%3D95694%7Chk%3D005e7ca7deb816aad1f527ba516dc8e62e9a3d07

(대학교 2학년 때 전공 과제로 썼던 글)
(교토 조정의 공경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조슈번 토막파 지도자로 표기한 오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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