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슐츠 씨 (2)
2022/09/13
해리엇 글릭먼의 답장은 아래와 같다:
친애하는 슐츠 씨,흑인 아이들을 피너츠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말씀드린 제 편지를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선생님께서는 흥미로운 딜레마를 제기하셨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선생님의 편지를 제 흑인 친구 몇 명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인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슐츠 씨,
흑인 아이가 피너츠 만화에 들어가는 문제로 선생님께서 글릭먼 씨와 주고받으신 편지와 관련해서 아들 둘을 가진 흑인 아빠로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려다보며 베푸는 태도(patronizing)를 염려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노력을 그런 눈으로 보는 흑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비록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그런 비난은 (흑인 아이를 만화에 포함시킴으로써) 일어날 긍정적인 결과를 위한 작은 대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인종 간의 증오가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너츠에서 아이들이 그룹으로 등장할 때 흑인 아이 하나가 여분의 캐릭터로(supernumerary) 등장하기만 해도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제 아이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신들이 묘사되는 방식을 보는 것에 대한 저의 근심을 덜어줄 것이고, 둘째, 일상적인 풍경에서 인종 간의 우호적인 태도를 캐주얼하게 전달할 것입니다.
저는 흑인 아이의 캐릭터가 굳이 여분의 캐릭터로 등장(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 배우처럼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옮긴이)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있는 장면에서 흑인 아이가 끼어있게 되면 훗날 흑인 아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이를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이 여분의 캐릭터로 등장할 때는 대개 교도소 같은 불행한 상황이고, 흑인들이 평범하게 생활하고, 사랑하고, 걱정하고, 호텔이나 회사 건물의 로비에 들어가는 모습, 뉴욕시내를 돌아다니는 풍경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는 영화와 TV, 잡지, 만화 같은 업계에서 이렇게 묘사하는 습관은 교활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이렇게 흑인들의 의견을 직접 듣게 된 슐츠는 생각을 바꾸게 되고, 7월 1일에 해리엇 글릭먼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글릭먼 씨,
기뻐하실 소식이 있습니다. 7월 29일에 나오게 될 만화에서 만화에 흑인 아이를 등장시키는 문제와 관련해 제가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린 에피소드를 보시면 기쁘실 겁니다.
인종차별에 관한 교육도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황인종이 앞도적으로 많은 국가이다보니 인종차별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거시적인 거는 아는데 미시적인거는 모르는 이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예의를 차리고 차별을 안 하려고 해도 정보가 없어서 일어나는 트러블도 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중에서는 성희롱 발언인데 모르고 쓰시는 분도 꽤 많습니다. 엉덩이가 큰 여성을 보고 순산할 것 같다는 등, 마지막으로 연예가 언제냐는 등 뭐 그런 거죠.
차별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은 정보 공유하는 시민 사회의 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인권문제를 넌즈시 던진 피너츠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토큰 블랙의 용어도 알았고요. 피너츠 만화에 그런 인권과 관련한 사연이 있을 줄 전혀 몰랐으니까요. 좋은 소재로 글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인권문제를 넌즈시 던진 피너츠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토큰 블랙의 용어도 알았고요. 피너츠 만화에 그런 인권과 관련한 사연이 있을 줄 전혀 몰랐으니까요. 좋은 소재로 글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