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라는 미래와 최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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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문화비평
2023/11/07
필립 케이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아포칼립스라는 미래와 최후의 집

먼저 영화의 원작인 필립 케이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결과적으로 『블레이드 러너』는 원작과 상당히 다른 길을 갔지만, 영화의 기본 플롯을 소설 줄거리에서 가져온 것은 맞다. 소설의 주인공 릭 데카드는 안드로이드 탈주범을 처리하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영상 전화나 비행 자동차나 레이저 총이 상용화된 미래 도시에서 안드로이드 여섯 기를 연이어 사살하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는 길고 대단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소설 속의 릭 데카드는 영화 속의 릭 데카드와 다른 세계에 살고, 그래서 다른 인물이 된다. 

영화가 막연히 인조인간이 상용화되고 우주 개발이 시작된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데 반해, 소설은 명시적으로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다. 핵전쟁으로 햇빛이 차단되고 지구 생태계가 재생산 능력을 상실하면서, 세계는 엔트로피의 절대적인 지배 하에 적막과 공허,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 속으로 천천히 침잠하고 있다. 미래는 지구 바깥의 식민 행성들로 옮겨갔고, 역사의 동력은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로 대체되었으며, 그럼에도 지구에 남은 한 줌의 사람들은 도시에 모여 살면서 과거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지키려고 애쓴다. 이들은 전쟁 이전의 인간성과 생명력을 아직 상실하지 않았음을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입증하려고 두문불출하는데, 이러한 상황이 지구인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기묘한 연극처럼 보이게 한다. 

릭 데카드는 이들의 일원으로, 가족이 있고 이웃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스스로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소시민이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평범하지 않다. 그가 아내 아이랜 데카드와 함께 사는 아파트는 그나마 인구밀도가 높다지만 반쯤 비어 있고, 그는 과학적으로 생식 능력이 인정 받았다지만 아이가 없다. 데카드 부부는 다른 이웃들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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