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가 그리는 윤곽선: 정수민의 음악에 대한 사적인 기록

조원용
조원용 인증된 계정 · 책과 음악이 여전히 반가운 사람.
2024/03/31
 그날은 시위 장소에 도착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출동 차량을 타고 접근하는데 저 멀리서 이미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것 같은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도착해서 내린 곳은 천호동 동서울 시장. 건물 여기저기에는 철거 집행을 알리는 ‘X’표시와 ‘철거 예정’ 문구가 래커로 거칠게 적혀 있었다. 철거 용역과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의 대치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의무경찰로 복무 중이었다. 주로 경찰서 보초를 서거나 군∙경 합동훈련에 나가고, 관내(구내)에 시위가 있을 때 출동하는 역할이었다. 다소 급하게 출동을 지시받고 나간 현장이었는데, 시위 규모는 출동 인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우리가 알만한 브랜드의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운동화와 셔츠, 맨투맨을 입고 전철연과 욕설을 주고받는 ‘용역 알바’들이었다. 이들은 스무 살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혹은 넘기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마치 친구들과 약속을 나온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알바’들의 관리자로 보이는 남성은 여자들을 앞에 내세웠다. 이들이 일하는 방식은 잔혹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거울을 깨뜨려 스스로를 위협하고 용역과 철거 펜스를 치는 인부들에게 오물을 뿌리며 생존을 울부짖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때 장소에 매몰되는 느낌과 함께 가치판단조차 무의미해지는 시간을 경험했다. 당시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일상에 감당하기 부끄러운 파편이 박힌다’. 뒤집어쓴 오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악취는 씻을 수 있지만 광경은 결코 쉽게 휘발되지 않았다. 나는 누구를 위해 방패를 든 것일까.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다. 내게 떠오르는 건 두 가지였다. 아빠, 그리고 정수민의 음악.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갈 무렵까지 아빠는 신문사에서 일했다. 그곳에 1988년에 입사하여 2006년 말에 나왔다. 20년 가까이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 건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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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필자 &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재즈가 가진 즉흥의 가능성과 경계 위 음악 세계를 부연하고 있습니다. 종종 영화를 만들고 자주 사진을 찍습니다. 재즈를 포함한 여러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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