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피린 ㅣ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세계
2023/10/23
속봅니다. 서울 상공에 출현한 괴물질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정부의 공식발표현장을 직접 연결합니다. 눈에 익은 장관의 얼굴이 잠시 후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건의 개요와 진행, 조사위의 발족과 연구 과정, 각국의 과학자들이 참가한 실험과 검증 . . . 장광설 끝에, 그리하여 저 물질은 백 퍼센트 순수한 <아스피린>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스피린?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곧이어 단상에 오른 조사위의 과학자가 무수한 검증을 거쳤다는 발표를 했다. ㅡ 박민규 소설집 < 더블 > , 단편 아스피린 중
서울, 한낮에 거대한 원형이 하늘에 떠 있습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원형입니다. UFO일까요 ?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그것은, 음...... 그러니까 거대한 아스피린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두통, 치통, 생리통엔.... 아스피린입니다.
아, 아아아스피린이 어떻게 하늘에 떠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박민규 소설집 << 더블 >> 에 수록된 단편 < 아스피린 > 이야기입니다. 황당한 마음은 독자뿐만이 아닙니다. 소설 속 인물들도 보름달처럼 떠 있는 거대한 아스피린에 대하여 황당해 하기는 마찬가지이니까요. 아스피린의 출몰 첫째 날에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아스피린의 출몰 이후, 지구인에게 " 남는 건 모두의 적응(163쪽) " 뿐입니다. 아스피린이라는 기표를 언어적 기호로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아스피린은 언표의 바깥에 위치하니까요.
이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라캉 이론입니다. 국어국문학 석사 논문에서 " 라캉 " 이라는 이름을 단 한번이라도 거론한 적이 있는 논문은 전체 논문의 94%라고 합니다. 깜짝 놀라셨죠 ? 네에.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죠. 프로이트 이론은 정신 분석보다는 문학 이론에 가깝다고 말이죠. 라캉은 이제 단순히 정신 분석을 떠나서 문학 이론의 핵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