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미국의 참전, 공포정치

최경식
최경식 인증된 계정 · 역사와 시사에 진심인 작가 겸 기자.
2024/11/06
[4]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이집트 '카이로 회담'. 장제스는 이 회담을 통해 자신과 중국의 국제적 위신을 드높이는 듯했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미국의 참전
일본군은 전쟁 발발 이후 전반적으로 승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쟁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인 전력에서 중국군을 압도했지만, 워낙 중국 영토가 거대하고 중국군과 국민들의 항전 의지가 거세다 보니 승전을 원활하게 이어가는 게 힘들어졌다. 이에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가열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석유 등 '자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장기전으로 치닫는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가능하게 수행하려면 충분한 자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중국 대륙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동남아에는 일본이 전쟁을 감당할 만한 수준의 자원이 매장돼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움직임을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원래 일본의 중국 침략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미국은 그들이 동남아에서까지 활개 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설득과 경고를 번갈아가며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크게 개의치 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출했다. 미국은 강력한 제재에 들어갔다. 특히 '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에서 수입했던 일본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군이 동남아는 물론 중국 대륙에서 철수한다면 제재를 풀어줄 것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욱 강력한 제재를 단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그동안의 성과들을 내려놓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미국과 대결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껏 상대한 국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엄청난 자원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전시 체제로 전환 시 군사력은 예측 불가능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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