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빈 옷장』

2024/02/13
나열식 서술이 다소 난해하다. 갑작스런 은유가 떠오르고, 건너뛰고, 생략한다. 마치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내용의 구분도 없었다. 그래서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호흡을 멈출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화자 르쉬르는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갔고, 변해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삶의 기록이었다.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바뀌고 도저히 구획을 나눌 수 없는 연속된 삶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다.

독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 장면이 너무도 강렬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물의 여자아이가 겪는 낙태라니. 그에 대한 자초지종도 설명하지 않고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까닭에, 르쉬르가 어째서 그런 장면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르쉬르의 어린 시절은 풍요롭고 행복했다. 식료품점과 카페를 겸하는 부모님의 가게에서 르쉬르는 늘 주인공이었다. 물건이 많은 환경에 살았고, 무엇이든 손을 뻗어 가질 수 있었다. 카페의 손님들은 모두 르쉬르를 알았다. 이들은 공사장 인부이거나, 요양원에 사는 노인이거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외상이 기본이었다. 르쉬르는 이들을 좋아했다.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 경박한 태도, 비속어가 가득한 투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었다. “그곳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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