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이라는 주술적 신앙 : 테크노-옵티미즘의 확산

전업교양인
전업교양인 · 생계를 전폐하고 전업으로 교양에 힘씀
2024/04/26

세계의 서사, 세계의 산문, 집단적 무의식

문학 전공자들이 배우는 서사학 혹은 소설이론의 고전적인 논의 중에 그냥 (a) 사건의 연대기적인 나열과 (b) 서사로서의 플롯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예가 있다. 굳이 번역해서 인용하지 않으려고 풀어서 적고 있는 것이긴 한데, "왕비가 죽었다. 왕이 죽었다."라고 쓰면 전자이지만, "왕비가 죽었다. 기뻐하다가 왕이 죽었다."라고 쓰면 후자라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예는 이와 다르니까 정말로 이런 예를 든 건 아니다. 

아무튼 둘의 차이는 일종의 인과적 연결에 있다. 연대기적 나열은 앞뒤 사건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연결이 존재하지 않지만, 서사로서의 플롯은 서로 유의미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 핵심은 인과에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그 연결이 가능해지는 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선이해 덕분이다. 그러니까 (물론 유머다) 부인이 죽었다고 남편이 기뻐할 수도 있다는 것, 너무 기쁜 감정이 격하면 (심장마비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등을 우리가 미리 이해하고 있어야 이 사건들의 흐름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한다는 건, 보통 그것들을 더 일반화시킨 범주에 소속(그러니까 어떤 유형에 속하는 한 사례로 포함)시키거나 이런 선이해의 도움으로 인과적인 연결의 그물망을 만들어낼 때 가능하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갑자기 사무실의 직원 하나가 "나 일 안 하겠습니다."하고 뻗대며 자기 자리에서 가만히 멍하니 앉아있는 이해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1) 저런 게 최근 정신병리학에서 보고되고 있는 '바틀비 증후군'의 발병 사례라는 설명을 듣거나 (2) 자신과 결혼할 거라고 믿었던 여자친구에게 청혼하는 날 이별통고를 받아서 저렇다는 설명을 듣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이미 알고 있고 납득하고 있는 세상의 이치(the ways of the world)를 표현하는 문장을, 나는 '세계의 산문'이라고 제멋대로 부르고 있다. 그냥 피상적으로 멋져 보이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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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건 무엇인지 고민하다 자기 한 몸 추스리는 법을 잊어버린 가상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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