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대결로 치닫는 용과 사무라이
2024/08/26
[1]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대결로 치닫는 용과 사무라이
1925년 중국 국민당의 창설자인 '쑨원'이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가 누가 될 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1926년 1월에 열린 제2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가 공식적으로 국민당의 영수가 됐다. 다만 표면적인 모습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 실권을 거머쥐었다. 바로 '장제스'였다. 그는 앞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당내 지위가 갈수록 높아졌고 군대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왕징웨이가 행정적, 사상적 측면에서 강점을 가졌을지 몰라도 장제스의 무력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제스는 1926년 6월에 '국민혁명군'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이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2년 넘는 기간 동안 '북벌 전쟁'을 전개, 중국 중부 및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1928년 장제스는 중부 도시인 '난징'을 수도로 정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사실상 중국의 통일 정부였다. (다만 국민당 정부의 통제력이 중국 전역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난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정부의 통제력이 미비했고 군벌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제스는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19세기부터 수많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을 침략해 수탈한 역사를 직시했고, 소련 당국과 중국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의 통제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우려감을 나타낸 것은 일본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갖고 있던 일본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1927년 상하이에서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 작전(상하이 쿠데타)을 경험한 바 있는 만큼, 극도의 경계 태세를 갖췄다.
국민당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중국...
저서로 [정변의 역사], [암살의 역사], [숙청의 역사-세계사편],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