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적들을 상대하는 법 - 이태준, <제2의 운명>

윤지연 · 교사
2023/11/22
이태준, <제2의 운명>

친밀한 적들을 상대하는 법 -   이태준, <제2의 운명>
   
1.

필재가 천숙의 핸드백을 마음대로 뒤지는 식으로 프라이버시를 무너뜨리는 장면은 잠시 극적 긴장감을 높이지만, 갈등을 유발하는 대신 도리어 연인 간의 ‘친밀함’을 극대화한다. 그 결과,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반지의 내력이 상세히 밝혀지고 긴장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풀려버린다. 천숙이 금강석 반지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리는 과장된 장면은 물질과 정신의 대결구도에서 정신이 승리하는 첫 장면인데, 이는 필재와 천숙의 친밀권(親密圈)이 거둔 승리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친밀권은 ‘사회적인 것’의 위력, 그 획일주의의 힘에 저항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천숙을 포기하도록 강요되는 형식으로 필재에게 가해지는 전방위적 압력은 곧, 물질에 굴복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의 획일주의이다. 학생인 필재가 여기에 대항할 유일한 방법은 천숙과의 친밀권을 강화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서술자는 그 친밀권이 매우 허약한 상태라고 보는 듯하다. 천숙과 필재의 편지가 어긋나고 사이가 틀어지는 과정은 너무 간단히 처리되며, 오해가 풀어지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린다. 사실, 천숙과 필재의 친밀권은 혼전순결을 깨는 방식으로 획일주의에 대항하려는 천숙의 시도가 실패하는 순간, 즉 필재가 이 계획을 거절했을 때 천숙이 수치심을 느낀 순간부터 와해되기 시작한다. “근대 이전과 비교하자면, 순결은 거리 혹은 지연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략) 만남 자체가 모든 것을 의미했던 상황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생각해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새로 펼쳐진 상황은 전연 달랐다. 

만남ㆍ교제ㆍ결혼이 분리되면서 정신과 육체는 이 각각의 단계에 세심하게 배분되었다. 육체는 일종의 최종심급,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확정하는 기호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필재에게 두 가지 모순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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