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서의 학문 - 장응진의 사례
2024/02/23
1880년 황해도 장진(長進)에서 출생한 장응진은 연배나 역사적 체험, 사유방식 등에서 이인직(1862년생)과 최남선(1890년생)․이광수(1892년생) 사이에 위치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16세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했던 장응진은 1897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한다. 이는 부친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는데,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자주 서울 출입을 하던 장의택(張義澤)이 신학문이 유입된 것을 보고 신식교육을 받기를 권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내용이 그리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차후 일본의 학제를 경험한 후 ‘대한의 외국어학교는 교육의 주의(主義)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관성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재하기 때문이 정비․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비판한 대목에서 읽을 수 있듯이 당시 외국어학교는 번역이나 통역을 위한 도구적 지식을 교수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운영에서도 설립 후 9년이 된 1903년 처음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단 19세기 말 서울에서 근대식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대한의 모순을 체감하고 개혁을 위한 실천에 동참할 수 있는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민권운동에 가세하기 시작한 신학교(新學校)의 학생들은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전화(轉化)되자 외국어학교 의학교 할 것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