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당한 빈민들의 봉기와 민란 – 광주대단지 사건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2/12/09

빈민, 보이지 않는 존재

1960년대 서울역 빈민촌의 모습. 출처: 우리역사넷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전란을 겪으며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청계천과 서울역 등지에 몰려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판자촌 시대가 열렸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서울은 빠르게 과밀화되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많은 사람들로 인해 서울은 금방 만원이 될 지경이었다. 도심의 교통체증과 주거난은 서울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속 서울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통에 서울의 산자락에는 다닥다닥 ‘하꼬방’이 들어서면서 달동네가 만들어졌다. 

청계천 주변, 신당리 공동묘지 일대, 서울역과 영등포역 쪽방촌, 후암동 해방촌, 현저동 무허가 판자촌, 만리재, 미아리, 아리랑 고개 등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서울의 빈민 거주지역이다. 물론 이곳들 중에는 이미 천지개벽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휘황하게 꾸며지거나, 중산층 가구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바뀐 곳도 많다.

1930년대 활동한 작가 박태원(『천변풍경』¹⁾)과 이태준(「아무 일도 없소」²⁾)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청계천과 신당리 일대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일상을 구성하고 도시의 허드렛일을 담당했던 하층민들의 거주지였다. 서울역과 후암동, 현저동 일대는 한국전쟁 시기 몸만 빠져나와 월남한 피난민들이 임시적으로 자리 잡은 터전이었다. 영등포와 미아리, 만리재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었다. 이처럼 서울 도심 구역의 빈민촌은 뿌리 깊은 역사성을 갖고 형성됐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100만에 불과하던 서울 인구는 1960년 250만으로 훌쩍 증가했다.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 1960년대 후반 서울은 이미 600만 명을 육박하는 메가시티가 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곧 1,000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서울의 인구는 행정 당국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주택은 부족하고 급수 사정도 열악해졌다. 일을 많이 해도 임금이 낮아,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정이 많았다. 도심의 교통체증은 점점 심해져 서울은 이제 인간답게 살기 힘든 도시가 됐다. 가정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가 제 때 처리되지 못하고, 도로 위에 정체된 차량이 내뿜는 매연으로 삶의 질은 더욱 나빠져 갔다.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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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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