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유럽 중세사

파라과이 박
파라과이 박 · 현재 한국 번역가 협회 회원입니다.
2024/03/17
1.프랑크 왕국

 

피핀과 교황의 거래 의의

 

751년에 피핀(PippinⅢ, 751-768)은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로빙가 최후의 왕 힐데리히(ChilderichⅢ)를 왕위에 서 축출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 로써 메로빙가를 대신하여 피핀의 가 문인 카롤링 가문이 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8세기 중엽은 향후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지 인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티움 황제, 로마교황, 롬바르드인이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 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 다. 이곳에서 패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서 유럽 역사의 향방이 좌우될 운명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정학 적으로 지중해 세계와 유럽대륙을 연 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외형적 인 중요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로 마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였다. 로마 는 고대 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의 중 심이라는 사상이 전통으로 전해내려 왔다. 그러므로 그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보다 넓을 세계를 지배할 수 있 는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 다. 사실 교황이 로마를 베드로의 유 적지로 그렇게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러 세력들간의 각축장이 된 이탈리 아 반도에서 주도권을 교황이 쥐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 단독으로 주 도권을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교황은 자체의 군사력이 없었 기 때문에 롬바르드의 무력에 효과적 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꾸준히 발달시켜 온 이론만으로는 교 황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 였다. 사실 로마를 지배할 수 있는 권 리에 대해서도 교황보다는 비잔티움 황제가 훨씬 더 역사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은 당시의 유럽 에서 급격히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 인들을 통해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 하였다. 요컨대 피핀의 쿠데타를 계 기로 프랑크 왕국과 제휴함으로써 교 황은 향후 중세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교황은 8세기 중엽 당시에 롬바르드 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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