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만한 시선] ‘문득 깨달음’과 ‘드러누움’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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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6

[문학 속 한 장면] 안톤 체호프 특집②


이리나: 오늘 잠이 깨자 일어나서 세수를 했어요. 그러자 문득 이 세상 모든 일이 명확해지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반 로마노비치, 난 다 알아요. 사람은 일을 해야 돼요. […] 만약 내가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지 않거들랑 나랑 절교해주세요.
체부티킨: (부드럽게) 절교하지, 아무렴, 절교해야지…….
올가: 아버지께선 우리가 일곱 시에 일어나도록 가르치셨어요. 요즘에 이리나는 일곱 시에 일어나긴 하는데, 그러고서 최소한 아홉시까지는 누운 채로 뭔가를 생각한답니다.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는!
이리나: 언니는 날 꼬마 계집아이로 보는 데 익숙해져서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 이상해보이겠지. 나도 이제 스무 살이야!
투젠바흐 : 노동에 대한 갈망이라. 아,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일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

체호프 희곡 <세 자매>

희곡 <세 자매>의 도입부에서 (세 자매 중의) 막내 이리나는 언니들과 하숙집 손님들 앞에서 선언한다. 오늘 아침 세수를 하다가 문득 세상사와 인생사를 깨달았노라고. 그러니 앞으로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이어지는 언니 올가의 말이 재미있다. “요즘에 이리나는 일곱 시에 일어나긴 하는데, 그러고서 최소한 아홉시까지는 누운 채로 뭔가를 생각한답니다.” <세 자매>의 도입부인 이 장면은 체호프 작품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체호프 소설의 인물들은 문득 깨닫고 바로 다음 순간 드러눕는다. 분사구문의 연속동작―아니, 동시동작일까?―이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인생에는 뭔가 더 중요한 것, 뭔가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계기는 다양하고 대중없다. 가령 단편 <미녀>에서 그 계기는 비범한 아름다움이다. <미녀>의 화자는 아르메니아 소녀 마샤를 보고 생각한다.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미녀>, 116쪽) ‘문득 깨달음’의 순간은 거울을 보다가도 찾아오고(단편 <거울>),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도 찾아온다(희곡 <세 자매>).

문득 깨달음의 순간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그것은 이리나가 말하듯 “문득 이 세상 모든 일이 명확해지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으로는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이 다짐 이면에 붙어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앞으로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대대적이고도 근본적인 관점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깨달음 이전의 삶은 무의미한 것, 어리석은 것, 본질이 아닌 허상을 뒤쫓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 더 있다. (아직 못 깨달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천박해 보이며, 인간의 삶 자체가 허망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별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면 깨달음을 얻은 이후부터는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체호프의 인물들은 생각한다. 드러누워서. 심각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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