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일본군의 승전, 난징 대학살

최경식
최경식 인증된 계정 · 역사와 시사에 진심인 작가 겸 기자.
2024/10/31
[2]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장면들.
■일본군의 연이은 승전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은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베이핑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완핑 인근에서 중국군을 겨냥해 총격을 가했다. 앞서 일본군 지휘관은 병사 1명이 실종돼 완핑에 진입해 수색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중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쑹저위안이 수색을 거부하자 '루거우차오'라는 다리를 사이에 놓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간 벌어진 전투는 장제스에게 곧바로 보고됐다. 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일기에 "왜구가 루거우차오를 공격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군대를 보내 일본의 야욕을 꺾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더욱이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이핑은 역사적 상징성이 큰 만큼, 가급적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노에는 "가장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밝혔고,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동원령을 선포했다. 일본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국군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목표로 하는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7월 26일,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표적은 베이핑과 톈진이었다. 폭격기 등을 동원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에 이 도시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이외에 중국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당시 장제스는 당초 결의와 달리 정예병력을 신속히 북부 지역에 투입하지 않았다. 해당 군벌들에게 방어를 맡기다시피 했다. 장제스는 다가오는 더 큰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난징으로 돌아와 군사위원회 회의 및 비밀 합동국방회의 등을 열어 전쟁과 관련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국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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