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 주체화의 가능성,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 『젠더 트러블』
여성 정치 주체화의 가능성,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의 정치학이 ‘여성들’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는 ‘주체’ 없이도 가능한 것일까. 여성 즉,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이처럼 ‘우리’라는 위상은 실상 빈약하고 환영적일 뿐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정체성의 정치학을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정체성이란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점이 고양될 수 있는, 그에 따라 정치적 행동이 취해질 수 있는 자리에 놓여야 한다고 가정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주장은 ‘행위 뒤의 행위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행위주체성’의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는 보통 ‘주체’의 생존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주체’는 그것이 타협해나가는 문화의 장에 선행하는 어떤 안정된 존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주체는 반대편 인식론의 틀에서 담론적으로 구성된 환경을 마주하게 되고 곧 문화에 빠져 있는 주체는 이런 구성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단언하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구성물과 협상한다. 즉 ‘나’는 젠더와 완전히 동일시 될 수 없는 행위주체성의 한 지점인 것이다. 문화적 선언들이나 정체성의 이론의 나열 속에 등장하는 ‘등등(etc)’은 끝없는 의미화 과정 자체에 대한 기호인 동시에 소진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이것은 보충이고 정체성을 상정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결코 수반하는 일이 없는 넘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