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90편 -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알바니아 민족주의 (上편), 코소보 전쟁의 맥락, 시발점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에서 기인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15
21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코소보 전쟁, 많은 사람들은 코소보 전쟁이 세르비아와 코소보, 나토의 미국의 세르비아 폭격 등으로 요약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을 틀린 말이다. 만약 이를 단순히 세르비아와 코소보, 나토 및 미국과의 관계로만 근원적인 부분에 접근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코소보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 이념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현대판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정면 충돌이다. 거기에 곁가지로 미국과 나토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압살하기 위해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힘을 실어준 전쟁이라 볼 수 있다.
사진 :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시위, 출처 : KOSOVO 2.0, By Fitim Salihu

따라서 이 전쟁은 1992년 이후에 나타난 남슬라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이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해 세르비아 관련여러 연재한 내용들을 통해 언급해왔다면 이번에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고대 시기 일리리아 인들이 알바니아와 발칸 지역들에 정착하면서 로마 제국과 슬라브, 고트족들이 오기 전까지 원주민으로 남아있었다. 로마 제국이 발칸을 정복한 이후, 일리리아인들은 로마인들과 혼혈하면서 계속 발칸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들어온 슬라브족들은 남슬라브계 민족을 형성하며 발칸에 정착했고 이 때부터 로마인과 믹스된 로망스-일리리안들과 대립의 역사를 갖게 된다.

이 로망스-일리리안들이 바로 알바니아인들의 혈통적 직계 조상들이다. 이들은 중세 시기에 불가리아 제국 및 세르비아 왕국과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로망스-일리리안들은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과 대립해 나간다. 현대 알바니아인들의 스칸데르베그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고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도 스칸데르베그의 기마동상과 광장이 있다. 

로망스-일리리안들이 알바니아인으로 인식된 것은 로망스-일리리안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브리(Arbri)에서 태동하여 이를 그리스어로 알바니아(Albania)라고 발음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당시 스칸데르베그와 그의 일족인 로망스-일리리안들을 두고 그리스인들이 알바니아라 부른 것을 자신들의 민족명으로 삼았던 것이고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인의 시조이면서 최초의 왕이자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본질을 알려면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라는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스칸데르베그의 가문인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양인 검은 독수리는 현재 알바니아 국기의 문양이다.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한 이후, 알바니아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아들여 알바니아계 정체성을 지니고 무슬림들로 개종했다. 오히려 보슈냐크인들보다 빨리 무슬림으로 개종했기에 오스만 제국 고위 관료로 상당수 등용되기도 했고 오스만에 자리잡은 알바니아계들은 후일 터키 공화국이 세워졌을 때도 터키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터키 7대 대통령이자 6.25 터키군 참전 용사인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이 대표적인 알바니아계 터키인이라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알바니아계의 특성은 어느 나라에 정착하든 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지만 자신들의 고유 정체성은 그대로 지니면서 잡초 같이 살아 남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닌 채로 현지화로 녹아든다는 것에 있다. 이런 특이한 특성의 근원에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혹은 로망스-일리리안 민족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알바니아(Shqipëria e Madhe)라 불리는 민족통일주의 개념이 주된 이념이다. 알바니아와 코소보, 그리스의 이피로스 주와 몬테네그로의 울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서부 지역과 세르비아의 프레셰보와 메드베자, 부야노바츠 지역을 통합해 "강한 알바니아(Strong Albania)"로 거듭나 발칸 최강국으로써 번영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알바니아의 민족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때는 언제일까? 때는 19세기 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영향으로 같은 슬라브계 민족들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서 오스만의 영향력이 약화된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인들은 슬라브계 민족의 발호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무슬림인데다가, 오스만 제국에 적극 충성하여 그에 대한 댓가도 받았었고, 무려 42명의 오스만 제국 재상들이 알바니아계였기 때문에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있어 터키인과 동급 으로 취급되면서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거주하는 영토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으로 분할되어 넘어갈 것을 우려하게 된다. 따라서 알바니아인들은 민족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모임을 갖기로 했다. 불리한 전황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전쟁이 한창이던 1877년 12월 12일에 코스탄티니예에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알바니아 민족의 권리 보전을 위한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for the Preservation of the Rights of the Albanian People)"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지역 단위로 흩어져 있어 남슬라브계 민족에 의해 자 민족의 안보를 우려하던 알바니아인들이 처음으로 단체행동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78년 초에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알바니아인 상당수가 거주하던 지역들이 영토 할양에 포함이 되니 알바니아인들은 서로 단결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1878년 6월 10일, 47명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베이들이 코소보 프리즈렌에 모여 알바니아 민족 영토 전체를 보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의하게 된다. 

당시 맺어진 프리즈렌 동맹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것으로 종결했지만 첫 회의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통합과 자치, 개혁 등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모였다는 것 자체가 당시 오스만 지배 하의 흩어져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결성된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적 성향이 매우 두드러지는 단체였다. 이 단체의 성격으로 볼 때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발송된 프리즈렌 동맹의 각서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터키인이 아니며 터키인이 되지 않도록 하는만큼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우리를 슬라브인, 오스트리아인이나 그리스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게 맞설 것이다.  우리는 알바니아인이고자 한다. (Ne nuk jemi turq dhe aq sa nuk do ta lëmë veten të bëhemi turq, do të luftojmë me të gjitha forcat kundër atyre që do të na bënin sllavë, austriakë apo grekë. Ne duam të jemi shqiptarë.)" - 알바니아어 번역문 

오스만 제국은 비록 러시아와 전쟁에서 패전으로 끝이 났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는 알바니아 민족단체를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프리즈렌 동맹 각서를 보고 이에 대한 불편함을 느껴 동맹 인사들이 자신들을 알바니아인이 아닌 "오스만인"으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게된다. 이에 반발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만 제국과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으며 프리즈렌 동맹은 만장일치로 압딜 프라셔리(Abdyl Frashëri)를 동맹 대표로 뽑아 그의 영도 하에 알바니아 자치와 반 오스만 성향을 갖게 되면서 스칸데르베그 이후, 400년 만에 군사행동을 나서게 된다. 

이처럼 프리즈렌 동맹은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반란에 나서게 되자 알바니아의 독립을 우려한 오스만 제국은 동맹의 해체를 요구하게 된다. 이처럼 프리즈렌 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첫 충돌은 베를린 회의로 인해 몬테네그로 영토 할양을 처리하고 있던 제독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으며 프리즈렌 동맹은 여기서 메흐메트 알리 파샤를 포함한 오스만 지휘관 다수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프리즈렌 동맹은 1879년에서 1881년간 알바니아 민족 영토를 할양 받아 점유를 확립하러 오는 몬테네그로의 군대와 지속적으로 격돌하여 패퇴시켰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주변국들과 충돌하여 독립을 꿈꾸던 프리즈렌 동맹을 좋지 않게 보던 베를린 회의의 강대국들은 오스만 제국에 알바니아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고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데르비시(Dervishes) 파샤 장군 휘하의 대규모 진압군을 편성하여 프리즈렌 동맹을 공격했고 아직도 강력한 오스만 정규군에게 1881년 4월, 프리즈렌이 함락당하며 동맹은 해체되었다. 

이로써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 상당수는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오스만 제국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의 일시적인 성공은 몬테네그로와 그리스로 할양되던 지역 일부를 재협상하게 되었고 이렇게 재협상 된 영토들은 30여년 후 제1차 발칸 전쟁당시 몬테네그로와 그리스로 할양되어 현재 몬테네그로와 그리스의 영토로 남아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초석이 되어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통일, 알바니아 자치 및 독립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갔다.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근대적 태동으로 여겨진다. 1905년 알바니아 해방 비밀 결사가 결성되고 1912년에 코소보 프리슈티나에서 발생한 알바니아 봉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프리즈렌 동맹에서 결의된 알바니아 영토를 구성하는 4개 빌라예트(Vilayet, 州)들은 대알바니아주의를 제창하며영토를 수복하자는 선동에 나서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국경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에게도 성지(聖地)나 마찬가지이며 세르비아 또한 민족적 성지(聖地)를 주장하면서 코소보를 둔 대립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내일은 中편, "알바니아 민족주의 백타쉬파와 코소보 해방군 결성"에 관한 연재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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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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