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죽였다" 이런 말 안 나오는 독일, 시사점은?
2024/01/29
고 이선균 씨는 영화 ‘기생충’으로 유럽에 얼굴을 알렸습니다. ARD, DW 등 독일 주요 언론은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선균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제목으로 그의 최근 부고를 알렸습니다.
물론, 독일에서는 한국의 연예인에 관한 소식이 그리 큰 뉴스 밸류를 갖지 않기 때문에 국내 연합뉴스를 인용한 보도로 짧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주요국 언론들도 그의 죽음을 문화*예술 섹션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다루면서 그의 죽음을 덤덤히 알렸습니다. 영국 BBC는 “이 씨의 마약 혐의 조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고, 그 과정에서 이 씨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저는 고 이선균 씨에 관한 독일의 보도와 누리꾼들의 반응을 보면서 한국의 여론 지형을 포개어 생각해 봤습니다. 스캔들에 휩싸인 유명인과 언론, 그리고 누리꾼 간의 역학관계는 한국과 독일이 명징하게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독일에서는 '언론이 유명인을 죽음으로 몰았다', '누리꾼이 유명인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 구조입니다.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론이 한 데 모인 포털이 없다
독일이나 유럽에서는 누리꾼의 반응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대형 포털 같은 곳이 없습니다. 실시간 기사 랭킹이 표시되거나 검색어 순위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식의 포털이 부재합니다. 한국의 '네이버', '다음' 같은 시장을 독식하는 채널이 없습니다. 물론 여기도 포털 사이트 자체는 있습니다. 주로 이메일 도메인을 만드는 용도입니다. 검색은 대부분 구글링으로 충당합니다.
@윤신영 저도 그런 변화에 일조했던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습니다. 도저히 그 안에서는 답이 없었습니다. 선배들은 요지부동이고 사실 정권이나 여러 눈치보며 생활인으로서 자리 지키기에도 버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언론인이라는 환상을 품은 후배들은 계속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걸 올스톱하고 진지하게 새로운 구조를 구상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전쟁이 아니고서야 없을 것이기에 우리나라에 메가톤 이슈가 벌어져서 판이 다 엎어지지 않는 이상 지금의 모습은 점점 더 악화일로일 듯 합니다. 저는 이제야 외부인으로서 덤덤하게 여러 아이디어를 꺼내보려 합니다.
@정병진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1950년대부터 적어도 공영방송과 주요 신문은 선정성으로부터 지켜질 방법이 구축돼 있었군요. 물론 어느 곳이나 선정적인 매체나 뉴스는 생겨나는 법이고 독일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그게 공영 또는 '언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분명히 선을 그을 수 있고 시청자-독자도 그걸 인지하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은 어느 틈에 그것이 완전히 무너졌죠. 애초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처럼 공영에서 사생활 문자를 단독 보도한다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일이 벌어져도 그게 굉장히 기이한 일이라는 감각이 사라질 정도가 됐습니다. 정책 분석이나 비판 같은 것이 없진 않지만, 다른 데 묻혀 드러나지도 않고 실제로 공동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언론이 조롱의 대상이 됐고 실제로 보도의 내용과 질도 다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독일에서 언론이라 하면 굵직하게 공영2사, 지역8사 + 유력일간지(FAZ, SZ 등), 시사주간지(슈피겔, Stern) 정도로 좁혀집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공영성이 강한 공영2사+지역8사 방송국의 뉴스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면 제 글에서 언급한 기조가 1952년 이후 대체로 유지돼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연합국은 나치와 괴벨스의 모든 채널을 해체했습니다. 이후 8개 지역 거점 방송국들이 연합해 ARD라는 제1 공영 방송 협의체를 출범했습니다. 오너가 없고 각 지역방송 대표들이 돌아가며 ARD 협의회 의장을 맡지요. 각 분야 100여명이 넘는 위원들이 대표성을 가지고 위원회를 구성해 방송 내용을 견제합니다. 이게 정권 비판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다 보니 아데나워 총리 때 2공영방송 ZDF가 승인을 받아 서로 견제, 경쟁, 협조하는 독특한 언론 지형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콘텐츠를 공유하고 각 지역별 주요뉴스를 공정하게 편성합니다. 8시 뉴스는 전국에서 ARD의 타게샤우라는 뉴스가 보도되고요. 15분짜리 종합뉴스이고, 그 이후로는 ZDF나 ARD의 심층 보도 프로그램이 밤 9시, 10시에 나갑니다.
이 구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 구조로 인해 '이선균 카톡 꼭지'는 100% 뉴스 런다운(당일 뉴스 구성)에 못 들어간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독일 메인 언론 주요 뉴스에는 주로 정치, 정책, 그것을 둘러싼 인물의 주요 발언 등이 다뤄집니다. 수신료로 재원을 충당하기에 시청률 경쟁을 하지 않고, 정권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성을 보장받다 보니 우리처럼 검찰발 소스에 뉴스가 선정적으로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부터 SAT1, RTL+ 같은 민영방송국이 사업 허가를 받고 방송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이 민영방송국들이 다소 인물 중심의 선정적인 뉴스를 내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 종편 출범 이후의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뉴스의 신뢰성과 영향력 면에선 여전히 ARD, ZDF 메인뉴스에 뒤집니다.
Bild를 비롯한 타블로이드지에선 영국 왕실 뒷이야기는 물론 포르노 스타의 적나라한 사생활이 여과없이 다뤄집니다. 신문들을 중심으로 K-Pop 여자 아이돌을 성적으로 묘사한다든지 더러 왜곡된 보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공영성을 지켜야 할 공영방송 주요 뉴스 만큼은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소식으로 구성됩니다. 이 전통이 전후 독일에 쭉 있어왔기에 설령 중간중간 이 핀트에 안 맞는 뉴스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별 특이사항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공영방송 시스템이 순결무구한 100% 대안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ARD 의장을 맡았던 인사가 공적자금을 사적으로 쓰면서 배임, 횡령 혐의로 실형을 받는 일도 있었지요. 사람의 본질은 비슷하니까요.
그럼에도 광고로부터 자유로운 경영,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네트워크 방송 협의체 등은 아직 독일의 공영 2개사 뉴스가 독일인들의 매체 신뢰도 조사에서 늘 1, 2위를 차지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윤신영 살펴보기에 너무 좋은 지점인 듯 합니다. 퇴근하면 내용 정리해서 업로드 해보겠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주 언급되는 소설이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독일에서도 1970년대엔 공적 영역 밖의 사실이 선정적으로 미디어를 장식했던 역사가 있던 것 같은데요(물론 양상이나 심각성은 지금의 한국에 비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나름의 비판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 분위기에서는 도통 해결책이 보이지 않네요.
@윤신영 저도 그런 변화에 일조했던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습니다. 도저히 그 안에서는 답이 없었습니다. 선배들은 요지부동이고 사실 정권이나 여러 눈치보며 생활인으로서 자리 지키기에도 버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언론인이라는 환상을 품은 후배들은 계속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걸 올스톱하고 진지하게 새로운 구조를 구상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전쟁이 아니고서야 없을 것이기에 우리나라에 메가톤 이슈가 벌어져서 판이 다 엎어지지 않는 이상 지금의 모습은 점점 더 악화일로일 듯 합니다. 저는 이제야 외부인으로서 덤덤하게 여러 아이디어를 꺼내보려 합니다.
@정병진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1950년대부터 적어도 공영방송과 주요 신문은 선정성으로부터 지켜질 방법이 구축돼 있었군요. 물론 어느 곳이나 선정적인 매체나 뉴스는 생겨나는 법이고 독일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그게 공영 또는 '언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분명히 선을 그을 수 있고 시청자-독자도 그걸 인지하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은 어느 틈에 그것이 완전히 무너졌죠. 애초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처럼 공영에서 사생활 문자를 단독 보도한다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일이 벌어져도 그게 굉장히 기이한 일이라는 감각이 사라질 정도가 됐습니다. 정책 분석이나 비판 같은 것이 없진 않지만, 다른 데 묻혀 드러나지도 않고 실제로 공동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언론이 조롱의 대상이 됐고 실제로 보도의 내용과 질도 다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독일에서 언론이라 하면 굵직하게 공영2사, 지역8사 + 유력일간지(FAZ, SZ 등), 시사주간지(슈피겔, Stern) 정도로 좁혀집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공영성이 강한 공영2사+지역8사 방송국의 뉴스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면 제 글에서 언급한 기조가 1952년 이후 대체로 유지돼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연합국은 나치와 괴벨스의 모든 채널을 해체했습니다. 이후 8개 지역 거점 방송국들이 연합해 ARD라는 제1 공영 방송 협의체를 출범했습니다. 오너가 없고 각 지역방송 대표들이 돌아가며 ARD 협의회 의장을 맡지요. 각 분야 100여명이 넘는 위원들이 대표성을 가지고 위원회를 구성해 방송 내용을 견제합니다. 이게 정권 비판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다 보니 아데나워 총리 때 2공영방송 ZDF가 승인을 받아 서로 견제, 경쟁, 협조하는 독특한 언론 지형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콘텐츠를 공유하고 각 지역별 주요뉴스를 공정하게 편성합니다. 8시 뉴스는 전국에서 ARD의 타게샤우라는 뉴스가 보도되고요. 15분짜리 종합뉴스이고, 그 이후로는 ZDF나 ARD의 심층 보도 프로그램이 밤 9시, 10시에 나갑니다.
이 구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 구조로 인해 '이선균 카톡 꼭지'는 100% 뉴스 런다운(당일 뉴스 구성)에 못 들어간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독일 메인 언론 주요 뉴스에는 주로 정치, 정책, 그것을 둘러싼 인물의 주요 발언 등이 다뤄집니다. 수신료로 재원을 충당하기에 시청률 경쟁을 하지 않고, 정권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성을 보장받다 보니 우리처럼 검찰발 소스에 뉴스가 선정적으로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부터 SAT1, RTL+ 같은 민영방송국이 사업 허가를 받고 방송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이 민영방송국들이 다소 인물 중심의 선정적인 뉴스를 내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 종편 출범 이후의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뉴스의 신뢰성과 영향력 면에선 여전히 ARD, ZDF 메인뉴스에 뒤집니다.
Bild를 비롯한 타블로이드지에선 영국 왕실 뒷이야기는 물론 포르노 스타의 적나라한 사생활이 여과없이 다뤄집니다. 신문들을 중심으로 K-Pop 여자 아이돌을 성적으로 묘사한다든지 더러 왜곡된 보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공영성을 지켜야 할 공영방송 주요 뉴스 만큼은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소식으로 구성됩니다. 이 전통이 전후 독일에 쭉 있어왔기에 설령 중간중간 이 핀트에 안 맞는 뉴스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별 특이사항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공영방송 시스템이 순결무구한 100% 대안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ARD 의장을 맡았던 인사가 공적자금을 사적으로 쓰면서 배임, 횡령 혐의로 실형을 받는 일도 있었지요. 사람의 본질은 비슷하니까요.
그럼에도 광고로부터 자유로운 경영,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네트워크 방송 협의체 등은 아직 독일의 공영 2개사 뉴스가 독일인들의 매체 신뢰도 조사에서 늘 1, 2위를 차지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윤신영 살펴보기에 너무 좋은 지점인 듯 합니다. 퇴근하면 내용 정리해서 업로드 해보겠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주 언급되는 소설이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독일에서도 1970년대엔 공적 영역 밖의 사실이 선정적으로 미디어를 장식했던 역사가 있던 것 같은데요(물론 양상이나 심각성은 지금의 한국에 비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나름의 비판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 분위기에서는 도통 해결책이 보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