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백지혁명’의 의미와 그 이후
2022/12/20
[아래 글은 내가 지난주에 올렸던 글https://alook.so/posts/jdt3kLG 을 좀 더 다듬고 확장한 것이다. 워낙 중요하고 계속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이 패배로 마무리될 때 마지막으로 진압되던 시위대가 들고 있던 피켓의 문구였다. 이 문구대로 5년 후에는 홍콩민중항쟁이 더 큰 규모로 폭발했다. 그러나 그 투쟁도 다시 폭력적으로 진압됐다. 그래서 이제 중국의 지배 영역에서 더 이상 저항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비관을 뒷받침하는 많은 설명들이 존재했다. 1999년 천안문 항쟁도 실패했고, 천안문을 공개적으로 기념할 수 있었던 홍콩의 숨쉴 틈마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이던 대만은 침략의 위험 속에 놓여 있었다.
시진핑의 집권이 장기화하면서 공산당 내부의 상하이방과 공천단과 태자당의 권력 분점과 경쟁 관계나 다른 목소리조차 사라졌다. 시진핑은 반부패를 내세워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국가주석의 임기제한도 없애고 ‘시황제’로 등극했다.
공산당은 시진핑 시대에 이르러 사회주의의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역사가 완성됐다는 교조적이고 기괴한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 단계론’으로 이것을 정당화했다. 주요 도시에는 안면인식 CCTV가 곳곳에 설치됐고, 공안은 영장없이 휴대전화와 SNS에 접근해서 ‘적대세력의 침투’와 ‘사회질서 교란과 파괴 행위’를 색출하고 처벌했다.
그럼에도 중국 본토의 ‘애국주의 청년세대’들은 ‘중국몽’에 열광하며 홍콩 민중항쟁이 전개될 때 연대의식이 아니라 증오감을 표출하며 시진핑을 돕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좌파적 분석으로 유명한 홍호펑은 “팬데믹과 중국 정부의 시민 사회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탄압으로 모든 종류의 시위가 멈춘 것 같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자발적...
이윤보다 사람이 목적이 되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함께 배우고 토론하고 행동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다른세상을향한연대>라는 작은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첫 책에도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1685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