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 돌봄) 담론의 새롭지 못함에 대하여

오찬호
2023/01/27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을 집필할 때, ‘공동 육아’를 장기간 취재했다. 공동 육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경험자들에게는 비슷한 패턴이 발견되곤 했는데, 그건 이들이 ‘공동’을 ‘바른’ 육아로 해석하는 자신감이었다. 궁금해서 어떤 점이 다른 게 아니라 바른 것인지를 묻고 또 물었지만 명확한 답은 없었다. 다만, 공동육아가 아닌 육아는 ‘바르지 않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추임새는 잦았다.

아쉽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어린이집을 교도소처럼 묘사했고, 그 단어를 따박따박 거침없이 말하기까지 했다. 학습활동을 이야기할 때는 유치원의 영어 수업을 꼬집으며 ‘학대나 마찬가지’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자연스레 본인들의 활동은 ‘윤리적으로 옳은’ 위치를 선점했다.

거시적으로, 그것도 매우 거시적으로 시야를 확대하면 어느 정도 맞는 설명일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비정상적 교육열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이와 호흡을 투박하게 맞출수록 오히려 좋은 교육이 되어버리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고도를 낮춰서 미시적인 일상 속으로 들어오려면 이야기는 달라져야 한다. 망원경으로 분석될 키워드를 현미경 안에서 찾으면 대화는 어그러진다. 아이가 6개월 때부터 ‘가장 가까운 곳’이 어린이집 선택의 절대 기준이었던 나는, 무안한 건 둘째치고 일단 기분이 나빴다.

그들은 내가 공동육아를 하지 않았음을 듣고서도, ‘공동육아를 하는 부모는 보통 부모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남다른지, 증거는 없었다. 그들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말만 하면서, 마음대로 설정한 반대편과 자신들을 분류하고 수직적으로 구분했다. 남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호자의 입에서 다양성은 배제의 연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르다!’는 신념이 과해서 나타나는 평범한 육아에 대한 혐오는 매우 뾰족했다. 에둘러 슬쩍 짚었지만, 인정도 인지도 안 했다.

그저 공동육아를 즐겁게 하면 될 일을, 이 즐거움을 비교할 반대편에 굳이 못난 포장지를 입히면서 발견한다. 길거리에 보이는 어린이집은 엉터리고 거길 보내는 부모는 잘못된 거라고 말할수록 자신의 선택은, 상식적이라는 증거가 없어도 상식적인 영역을 점령한다. 일부의 사례일 거다. 하지만 자신의 돋보임을 위해 한쪽을 괴상하게 만드는 현대사회의 색깔이 듬뿍 묻은 일부다. 부자 말하다가 가난한 이들은 한심하다는 폭력적인 설명이 등장하고, 긍정을 강조하다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은 입만 삐죽 나온 투덜이라고 무례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특별했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 Pixabay
정상가족 문제를 짚는 진부한 방식

최근 가족이나 돌봄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하자는 담론이 많아졌다. 고정관념이 깨지는 좋은 현상이다. 격려하고 연대하고 더 확장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야기가 뻗어가는 과정이 늘 효율적인 거 아니다. 가끔 토론회에 참여하면 느끼는 감정은, 공동 육아를 취재할 때와 비슷했다. 

다양한 가족·돌봄의 형태를 인정하자는 논의는 ‘기존 정상가족’의 한계를 부각하는 걸 피할 수 없다. 물론 ‘기존’의 형태는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제한적이다. 틀이 정해져 있으니, 그걸 기준 삼아 차별과 폭력이 정당화된다. 하지만 그 층위는 넓고 결은 무수하다. 모든 경우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거나 헤게모니에 순응하는 두 가지로만 설명될 순 없다. 지배와 순응의 강도 역시 고저의 높이차가 크다.

정상가족 ‘안’에 조각들은 참으로 많지만 이 조각들은 전통을 타파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는 원죄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각하는 불쏘시개가 된다. 수천 개의 조각이 정상가족이라는 팻말에 못 박히면, 어떤 건 새로움과 다양성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 가치를 보장받는다.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결속력을 높여주는 효과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방식이 패러다임의 확장과 사회적 동의에 이르는 여정에서도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정말로 다양성이 도드라지는 것이라면, 과정의 투박함은 과도기로 해석하면 그만일 거다. 하지만 환호만 존재하고 ‘속살은 그대로인’ 새로움이 많다. 정상가족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건 ‘여성의 목소리’ 없이는 불가능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한 명의 아버지 (옆이 아닌) 밑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어머니의 상황과 그 옆에서 어머니를 돕는 두 딸의 목소리가 교차되면서 정상가족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투박한 공기 ‘덕택에’ 염미정이 말하는 ‘추앙’의 맥락은 선명해진다.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딸, 그것도 막내딸은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앞뒤 따지지 말고 무조건 환대받고 싶음을 낯선 사람에게 전달한다.

환대하고 환대받으라는 ‘선순환’의 가치는 새로운 가족·돌봄의 핵심 연료다. 이 연료는 필연적으로 ‘여성’에게 울림이 크다. 정상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상처받은 여성들이 많이 모이고 많이 결의할수록 새로운 공동체는 견고해진다. 그런데, ‘그래서’ 오래된 사회적 관성이 전복되지 않으면서 ‘새로움’이 설명된다 ‘여성들이’ 결속할수록 드러난 특징은, ‘역시나 여성이기에’ 가능한 이유처럼 설명이 된다. 경력단절 극복을 위한 행사에 가보면 쉽게 보인다. 경력이 단절된 안타까움이 성토되는 것까지는 무난한데, 그 해법이라고 제시되는 내용 안에는 ‘엄마근성’, ‘엄마다움’, ‘엄마라면’ 등의 단어가 무수하다. 성차별의 결과로 모여, 성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 난다. 이 어색함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새로운 가족·돌봄도, 겉으로 드러나는 향기에는 다정함과 친밀감의 농도가 짙다. 이 감정을 공유하며 ‘안에서는’ 환대, 연대, 유대가 어우러져 있을 거다. 이 다정함과 친밀함은 정상가족 아래서 억눌렸다는 점에서 전복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성성이라는 전통적인 고정관념과 지독히도 쉽게 연결될 성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가’ 전복을 꾀했는가를 논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역시 여자들은 다르다’는 추임새가 등장하고 정상가족 안에서 쉽게 들리는 관성적인 성별 차이 이론과 큰 차이가 없는 말들이 이어진다. 여성을 ‘억압하는’ 정상가족을 벗어나, 다시 ‘여성다움’이 강조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 염제호는 말한다. “다 내가 건사하며 사는 줄 알았지. 집사람 떠나고 나서 알았어. 집사람이고 애들이고 다 날 건사하며 살았던 거야.” 정상가족의 속살을 적확하게 표현한 대사다. 염제호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젊은 자신에게 이 말을 했다면, 어떤 아버지가 되었을까? 겸손한 남자로 살았을 거다. 자녀들은 권위적이지 않은 아버지로, 아내는 착한 남편으로 기억할 거다. 미정이는 해방일지가 아니라 감사일지를 쓸 거다. 그 안에는 “우리 아버지는 다정했다”는 구절이 넘쳐날 것이다. 

그 이유로 가족은 아버지를 존경할 것이고, 아버지는 그 환대를 발판 삼아 여전히 전통적인 아버지 역할에 매진할 거다. 사랑이 넘치는 ‘과거보다 덜 불평등한’ 가정에서, 누구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타파할’ 필요성을 못 느낄 거다. 화기애애한 가족은, 그걸 원인으로 특별한 가족 역할이 개개인에게 부여되겠지만 ‘화기애애하니’ 문제 될 건 없다. 다정함과 친밀함‘만’ 과잉 부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상가족 앞에 붙은 ‘정상’이란 수식어를 깰 힘을 가질지 의문이다.

새로움을 존경한다. 하지만 새롭다는 말만으로 새로움이 보장되진 않는다. 때론 그 새로움이 기존의 패러다임임을 유지하는 정교한 동력이 된다. 조금만, 차분해지자.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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