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양쯔강 도강, 중국의 공산화
2024/11/23
[5]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핑진 전역
3대 전역의 마지막인 핑진 전역은 베이핑과 톈진 등을 중심으로 화북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다. 화이하이 전역이 한창 전개될 때인 11월 29일, 인민해방군(동북야전군+화북야전군)이 화북에 있는 국민혁명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발발했다. 당초 장제스는 화이하이 전역에서 참패가 예상되는 만큼, 화북을 방어하고 있던 국민혁명군이 베이핑과 톈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고립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창장강 방어선을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베이핑과 톈진이 갖는 상징성이 상당했기에 장제스는 망설임을 거듭했다. 그런데 화북 국민혁명군 지휘관인 푸쭤이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화북의 인민해방군이 자신의 군대보다 우세하지 못하고, 동북야전군은 앞선 전역으로 피로감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이른 시일 내에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푸쭤이는 남쪽으로 철수할 경우, 장제스가 자신의 부대를 접수할 것을 우려해 더욱 화북 사수를 고집했다.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푸쭤이는 직계 부대를 베이핑, 장자커우 등에 배치했고 장제스계 부대는 톈진, 탕구 등에 배치했다. 사전에 전황 조사를 한 모택동은 국민혁명군이 언제든 주요 도시들을 포기하고 남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럴 경우 창장강 방어선이 크게 강화돼 추후 (난징 등을 겨냥한) '도강' 작전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인민해방군의 진격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핑진 전역에는 동북과 화북의 인민해방군 부대가 대거 동원돼 약 100만 명에 달했다. 공격이 개시됐을 때, 모택동은 국민혁명군이 남하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포위한 뒤 공격하지 않거나 접근한 뒤 포위하지 않는' 다소 생소한 전략을 지시했다. 인민해방군...
저서로 [정변의 역사], [암살의 역사], [숙청의 역사-세계사편],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