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공산당의 반격, 급변하는 전황

최경식
최경식 인증된 계정 · 역사와 시사에 진심인 작가 겸 기자.
2024/11/17
[3]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인민해방군이 지난성의 파괴된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민심 이반과 공산당의 반격
중국인들은 내전 격화에 크게 분노했다. 중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족 간에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토가 황폐화 돼 기근이 발생했고 물가는 치솟는 등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전국 60개 지역에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규모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곤혹스러웠다. 대부분의 운동이 국민당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일어났고, 이들의 불만도 국민당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국민당이 내전을 촉발시킨 주범이라고 여겼다. 반전 운동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파업도 잇따랐다.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도 있다.) 국민당은 무력 탄압으로 일관했다. 모든 시위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국민당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언론 활동도 금지시켰다. 국민당의 전시 독재체제가 강화되면서 민심 이반은 더욱 극심해졌다. 반면 이 시기에 공산당은 되레 민심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에서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해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지역 농촌의 민심은 공산당에게로 급속히 기울었다. 농민들이 인민해방군에 대거 가담하는 결과도 낳았다.

섬북에 머무르고 있던 모택동은 슬슬 반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전략으로 허를 찌르기를 원했다. 핵심은 황허강을 도하하고 '중원'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이 황허강을 건널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강은 견고한 방어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황허강 주변에서의 국민혁명군 방어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류보청과 등소평에게 황허강을 도하하라고 지시했고, 펑더화이에겐 위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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