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델'의 실패

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2/26
  교수다가 외교 현장으로 뛰어든 허승철 전 우크라이나 대사의 경험을 적은 '나의 사랑 우크라이나'는 기회가 되면 구해 보고 싶은 책이다. 내가 본 부분은 이 포스팅(http://sonnet.egloos.com/4105927) 에서 본 작은 양에 불과하나, 허 대사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매우 잘 파악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러시아 엘리트 집단의 꿈은 우크라이나를 다시 러시아연방의 일원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우방으로서 러시아 영향력 아래 남게 하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민감정에 신경을 써서 신중한 전략을 펼쳤으면 친러시아 정권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 문화적 차이를 가볍게 여긴 러시아 수뇌부의 실책으로 우크라이나를 잃은 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라도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러시아 지도부는 아직도 우크라이나 국민 정서와 정치 문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실지회복에 급급해 단기적 전술만을 구사하는 조급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2007년의 국회 해산사태이다. 연정을 장악해 정국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오렌지 세력을 고사시키기 위해 의원 당적 변경을 무리하게 취하다가 의회 해산을 맞았고 결국 정부도 빼앗기고 말았다. 2009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가 여러 전략을 짜고 있겠지만 러시아의 딜레마는 매우 크다. 러시아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작위적인 수단을 쓰면 쓸수록 국민의 마음은 친서방으로 돌아서는 것이 문제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NATO가입에 대한 사전 위협으로 가스값 인상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오면 이 조치의 최대 피해자는 우크라이나 서민들이 된다. 러시아가 무력시위나 가스값 인상 등 강성 외교수단밖에 시용할 레버리지가 없는 것이 큰 문제이다· 국민들이 소련 시대로의 회귀를 원하고 러시아적 가치를 흠모하게 만들면 좋지만 이는 거의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러시아가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한 후, 주변국에 어필할 수 있는 러시아적 가치(Russian Value)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러시아 외교의 한계이다. 우크라이나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도 왜 우리는 러시아처럼 잘살지 못하는가 하고 따지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식 부의 모델을 우크라이나 국민이 동경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우리는 왜 유럽처럼 잘 살지 못하는가를 정치가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루지야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큰 불안감을 느끼고 러시아의 물리적 파워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친러시아적 정서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p.291~93)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의 말을 들어 보자(link;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80668.html) 는 옮긴이 강조.

[기자] 2014년 우크라이나인들이 친러시아 정부에 반대하며 일어난 마이단 시위가 미국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 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2014년 마이단 시위 당시 우크라이나 시민 다수가 ‘유럽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 러시아 모델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미국이 개입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은 젤렌스키 한 사람의 바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사람들 다수의 바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 러시아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

 이건 허 전 대사님의 책을 읽었다 싶을 정도다....

  정말 안타까운 것이라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지역을 영향권 아래 두는 것이 미국에게 쿠바처럼 '사활적 이익'으로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1997년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이 가입하면서 NATO의 동쪽 경계는 크게 모스크바에 가까워졌다(스웨덴과 핀란드는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적극적으로 NATO에 가입 신청함). 아래 지도는 2차 대전 때 나치가 가장 러시아의 영토를 많이 침략했을 때의 경계, NATO와 러시아 경계(2022년 기준이며 스웨덴과 핀란드를 포함시킴), 우크라이나-러시아 경계를 강조했다.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갈 경우 모스크바가 NATO 전선에 매우 가까워진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google map; modified
  지금처럼 직접 칼을 뽑았으니 정말 개망신 당하고 밀려 쫓겨나기 전엔 - 아니 설사 그렇게 밀려도 - 계속 병사 꼬나박으려 할 거라는 느낌이다. 푸틴이 암살 등으로 제거된다 해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원래 영토를 완전히 복구하고 - 즉 2014년 잃은 크름 반도와 돈바스를 되찾고 - NATO에 가입하는 것을 중/장기적으로 용인할지는 의문이다.(sigh)  근본적인 문제는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漁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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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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