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 후원하는 나도 빨갱이인가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9/06
경술국치 후 수많은 이들이 현해탄을 넘었다. 식민지 조선보다야 먹고살 만한 일자리가 더 있었고 비벼댈 언덕이 조선 땅보다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더 많은 조선인이 일본 전역의 탄광과 공장에서 일하게 됐고, 해방 무렵 일본에 터 잡고 살아가던 조선인은 무려 200만명에 달했다. 해방 후 상당수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이 귀국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에 제한을 두었다. 현금 1000엔, 물건으로는 약 110㎏이 전부였던 것이다. 1000엔이라고 해봐야 쌀 한 가마니도 못 되는 것이었으니 숫제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국하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결국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는다. 이른바 ‘재일동포’, 일본어로 ‘자이니찌’의 역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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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고국에 돌아가지는 못하게 됐지만 재일동포들은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인의 특징 하나를 공유하고 있었다. 바로 교육열이었다. 해방 직후 재일동포들이 난감해한 문제는 2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가르칠까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 우리말과 글에 익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조선인연맹 사무실이나 폐쇄된 공장 등을 빌려 이뤄지던 ‘국어강습회’는 ‘조선학교’로 확대되어 일본 전국에 약 500여 곳, 학생 수는 6만을 헤아리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재일동포들의 조직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다고 판단한 미군정과 일본 당국은 조선학교들을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해치는 공안의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 미군정과 일본 당국은 1948년 1월24일, 일본 교육실정법 위반을 들어 조선학교 폐쇄와 학생들의 일본학교 편입을 명령하게 된다. 
   
위키백과
“해방된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교육을 하겠다는데 왜 금지한단 말인가.” 재일동포들의 울분은 끓어올랐다. 재일동포들이 밀집해 살던 한신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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