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국민당의 파상공세, 공산당 심장부 함락
2024/11/13
[2]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국민당의 파상 공세
시점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1946년 6월 26일을 국공 내전 개전일로 본다.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 전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혁명군의 총병력은 430만 명이었다. 육군은 물론 16만 명의 공군과 3만 명의 해군 전력도 갖추고 있었다. 자동화기, 화포, 로켓포, 탱크 등 무기도 다양했고 질적인 측면도 우수했다. 홍군의 총병력은 127만 명이었다. 해군과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민혁명군에 비해 무기 및 장비가 열악했다. 장제스는 압도적인 전력에 기반해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는 정전 유효 기간이 끝나갈 무렵, 2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동시켜 공산당의 주요 근거지에 대한 공격 태세를 갖추게 했다. 마침내 때가 이르자 국민당 정부는 하얼빈, 장쑤성 북부, 산시성 서부 등 주요 지역에서 공산당이 완전히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게 먹히지 않자 곧바로 공산당의 '중원해방구'를 공격했다. 대륙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 주변에는 수천만 명의 인구와 드넓은 면적이 있었다. 난징 등 핵심 지역으로도 연결됐다. (이전에 국공은 중원 지대에서 무력 충돌을 억제하는 한커우 협정을 체결했으나, 국민혁명군은 이를 무시하고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홍군은 국민혁명군을 상대하기엔 너무 미약했다. 큰 타격을 받아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고 이내 국민혁명군에 포위됐다. 전멸을 우려한 홍군은 자발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했지만, 장제스는 홍군을 모조리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다급해진 저우언라이 등은 마셜에게 "정전협정을 위반한 국민당을 막아달라"라고 호소했다. 이에 중원해방구 중심지에 시찰단이 파견됐고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1개월 이상 지연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또 공산당을 도와준 셈이었다. 홍군은 공격이 지연된 사이 필...
저서로 [정변의 역사], [암살의 역사], [숙청의 역사-세계사편],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이 있습니다.